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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50년 동안 황제가 스무 명 넘게 바뀌었다. 군대가 황제를 세우고 죽였으며 은화의 은 함량이 5퍼센트 아래로 떨어졌다. 국경이 동시에 뚫렸다.
신라·고구려·백제가 차례로 서고 가야가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았다. 아직 연맹왕국 단계로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
왜역병과 흉작에 관리의 수탈이 겹쳤다. 태평도의 장각이 「푸른 하늘은 죽고 누런 하늘이 선다」며 수십만을 모았다.
결과진압을 맡긴 지방관들이 그대로 군벌이 됐다. 조조·유비·손권이 모두 여기서 이름을 얻었고, 후한은 이 난에서 실질적으로 끝났다.
왜화북을 평정한 조조가 남쪽까지 삼키려 내려왔다. 손권과 유비가 살아남기 위해 손을 잡았다.
결과화공으로 조조가 물러났다. 중국이 셋으로 갈라지는 형세가 굳어졌다.
황건적 진압으로 이름을 얻고 헌제를 옹립해 명분을 쥐었다. 둔전제로 군량을 자급한 것이 다른 군벌과의 결정적 차이였다.
국력이 위의 5분의 1인 촉을 이끌고 다섯 번 북벌했다.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해석이 많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전쟁 · 208 · 세 나라로 갈린 하루
화북을 평정한 조조가 남쪽까지 삼키려 내려왔다. 손권과 유비가 살아남기 위해 손을 잡았다. 화공으로 조조가 물러났다. 중국이 셋으로 갈라지는 형세가 굳어졌다.
【그때 그 자리】 AD 208년이다. 후한이 이름만 남아 있었다.
조조가 북쪽을 통일했다. 황제를 옆에 끼고 「천자를 받들어 신하를 호령한다」는 방식으로 명분을 쥐었다.
형주를 무혈로 얻었다. 유표가 죽고 아들이 항복한 것이다.
남은 것은 강동의 손권과, 갈 곳 없이 밀려 내려온 유비였다.
【왜 그렇게 됐나】 조조가 손권에게 편지를 보냈다. 「수군 80만을 이끌고 장군과 강동에서 사냥을 하고자 한다.」
항복하라는 뜻이었다.
손권의 신하 대부분이 항복을 권했다. 주유와 노숙이 반대했다.
주유가 조조군의 약점을 짚었다. 북쪽 병사들이 배에 익숙하지 않고, 새로 항복한 형주 수군은 믿을 수 없으며, 물이 맞지 않아 병이 돌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병력은 80만이 아니라 20만 안팎으로 본다.
제갈량이 유비의 사신으로 가서 손권을 설득했다. 손권이 칼로 책상 모서리를 베며 결심을 밝혔다고 전한다.
【어떻게 흘렀나】 조조군이 뱃멀미와 질병에 시달렸다.
그래서 배들을 쇠고리로 묶어 흔들리지 않게 했다. 「연환계」라 부르는데, 실제로는 상대의 계략이 아니라 스스로 한 조치로 본다.
황개가 항복하겠다는 거짓 편지를 보냈다.
마른 갈대와 기름을 실은 배 열 척을 몰고 갔다. 가까이 가서 불을 붙이고 작은 배로 옮겨 탔다.
동남풍이 불었다. 불배가 그대로 함대로 밀려 들어갔다.
묶여 있어 흩어지지 못했다. 불이 강가의 진영까지 옮겨붙었다.
조조가 화용도로 달아났다. 진창길에 병사들이 풀을 깔다 밟혀 죽었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제단을 쌓고 동남풍을 빌었다고 한다. 그해 그 계절에 동남풍이 부는 일이 드물지 않다는 것이 지금의 설명이다.
【그래서】 조조가 북쪽으로 돌아갔다. 다시는 남쪽을 통일하지 못했다.
유비가 형주 일부를 얻었고, 그것을 발판으로 익주(사천)로 들어가 촉을 세운다.
손권이 강동을 굳혀 오가 된다.
천하가 셋으로 갈렸다.
【남은 것】 실제 전투 규모는 「연의」가 그린 것보다 작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정사 「삼국지」의 서술은 훨씬 짧다.
역병이 조조군을 무너뜨린 주된 원인이라는 기록도 있다. 조조 자신이 뒤에 「배를 스스로 태우고 물러났다」고 적었다.
그래도 결과는 분명하다. 통일이 72년 미뤄졌다.
적벽의 위치조차 확정되지 않았다. 후보지가 여럿이다.
소식이 그곳에서 「적벽부」를 썼는데, 그가 간 곳은 실제 전장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그 글이 이 전투를 문학으로 남겼다.
지도에서 보기: 2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3세기 로마-사산 전쟁 황건적의 난 3세기의 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