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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로마가 지중해를 장악했지만 그 부가 공화정을 무너뜨렸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개혁이 유혈로 끝나고, 군벌들이 사병을 거느리며 내전이 반복됐다.
고조선이 무너지고 한의 군현이 설치됐다. 저항 속에서 부여·옥저·동예 같은 정치체가 자라났다.
왜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70여 명이 탈출했다. 이탈리아 각지의 노예가 합류해 12만이 됐다.
결과두 차례 집정관군을 꺾었으나 크라수스에게 진압됐다. 포로 6,000명이 아피아 가도에 십자가로 매달렸다.
자기 군대를 이끌고 로마 시내로 진군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처음 넘었고, 이후 카이사르가 같은 길을 간다.
카틸리나의 음모를 폭로하고 안토니우스를 탄핵했다. 그의 라틴어 문장은 유럽 산문의 교과서가 됐다.
지중해 해적을 석 달 만에 소탕하고 동방을 정복했으나, 삼두정치가 깨진 뒤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에게 졌다.
장군을 변호하다 궁형을 받았다. 죽는 대신 살아서 아버지가 시작한 역사를 끝냈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전쟁 · BC 73 · 로마 vs 검투사·노예 연합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70여 명이 탈출했다. 이탈리아 각지의 노예가 합류해 12만이 됐다. 두 차례 집정관군을 꺾었으나 크라수스에게 진압됐다. 포로 6,000명이 아피아 가도에 십자가로 매달렸다.
【그때 그 자리】
기원전 1세기 로마는 정복의 결과를 감당하는 중이었다.
지중해를 얻자 노예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탈리아 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였다는 추정이 있다. 대농장에서 쇠사슬을 찬 채 일하고 밤에는 지하 감옥에 갇혔다.
검투사는 그중에서도 특수한 부류였다. 죽는 것을 구경거리로 삼는 경기를 위해 훈련받았다. 카푸아에 큰 검투사 양성소가 있었다.
앞서 두 차례 시칠리아에서 노예 반란이 있었다. 진압됐다.
【왜 그렇게 됐나】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전한다. 로마 보조군에 있다가 탈영해 붙잡혀 검투사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원전 73년 그는 동료 70여 명과 함께 주방 도구를 들고 탈출했다. 처음에는 그저 도망이었다.
베수비오산으로 올라갔다. 로마가 보낸 소규모 부대가 산길을 막았는데, 이들은 야생 포도 덩굴로 밧줄을 엮어 절벽을 타고 내려가 뒤를 쳤다.
이 승리가 알려지자 사람이 몰렸다. 농장의 노예와 목동들이 합류해 수만이 됐다.
【어떻게 흘렀나】
2년간 로마 군단을 여러 차례 깼다. 최대 7만에서 12만까지 불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목표를 두고 갈렸다. 알프스를 넘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쪽과 이탈리아에 남아 싸우자는 쪽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전자를 원했던 것으로 전하는데, 무리가 갈라져 일부가 남았고 그들이 먼저 격파됐다.
기원전 71년 크라수스가 진압을 맡았다. 그는 로마 최고의 부자였고 정치적 이름이 필요했다.
크라수스는 자기 군대에 십일조형을 부활시켰다. 도망친 부대의 병사 열 명 중 한 명을 제비뽑아 나머지가 때려죽이게 하는 벌이다. 자기 병사를 적보다 무섭게 만든 것이다.
남부로 몰린 반란군은 해적에게 배를 부탁했다가 배신당했다. 크라수스가 반도 남쪽을 참호로 가로막았다.
마지막 전투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죽었다. 시신은 찾지 못했다.
붙잡힌 6천 명이 카푸아에서 로마까지 아피아 가도 200킬로미터에 걸쳐 십자가에 매달렸다. 지나는 모든 사람이 보게 한 것이다.
【그래서】
크라수스는 이 공으로 집정관이 됐고 뒤에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와 삼두정치를 맺는다.
노예제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대농장주들이 노예를 지나치게 가혹하게 다루면 위험하다는 것을 배웠다는 지적이 있다.
【남은 것】
이 반란에 대한 기록은 모두 로마 쪽 것이다. 반란군 자신의 목소리는 한 줄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로마 기록자들이 스파르타쿠스를 높이 평가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지혜롭고 온화하며 그리스인다운 교양을 갖췄다고 적었다. 적을 그렇게 쓰는 경우는 드물다.
18세기 이후 이 이름이 되살아났다. 볼테르가 정당한 전쟁이라 했고, 마르크스가 고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라 불렀다. 1919년 독일 혁명의 스파르타쿠스단이 이 이름을 썼다.
1960년 커크 더글러스의 영화가 결정적이었다. 나는 스파르타쿠스라고 모두가 외치는 장면은 사료에 없는 창작이다. 이 영화의 각본가 돌턴 트럼보는 매카시즘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사람이다. 노예 반란 이야기가 20세기 미국의 정치적 탄압에 대한 발언으로 쓰인 것이다.
2천 년 전 진 사람이 계속 불려 나오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졌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보기: BC 1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갈리아 전쟁 카이사르 내전 고조선-한 전쟁 킴브리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