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쿠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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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공화정의 위기

로마가 지중해를 장악했지만 그 부가 공화정을 무너뜨렸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개혁이 유혈로 끝나고, 군벌들이 사병을 거느리며 내전이 반복됐다.

한반도

한사군과 열국

고조선이 무너지고 한의 군현이 설치됐다. 저항 속에서 부여·옥저·동예 같은 정치체가 자라났다.

전쟁 1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BC 73 – BC 71
로마 vs 검투사·노예 연합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70여 명이 탈출했다. 이탈리아 각지의 노예가 합류해 12만이 됐다.

베수비오 탈출 BC 73실라루스 BC 71

결과두 차례 집정관군을 꺾었으나 크라수스에게 진압됐다. 포로 6,000명이 아피아 가도에 십자가로 매달렸다.

3년 · 로마를 뒤흔든 노예 봉기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4명

술라장군BC 82 · 로마로 군대를 몰고 온 첫 사람
BC 138 – BC 78

자기 군대를 이끌고 로마 시내로 진군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처음 넘었고, 이후 카이사르가 같은 길을 간다.

  • 로마 진군 BC 88 — 전례가 됨
  • 살생부로 정적 수천 명 처형
  • 독재관이 됐다가 스스로 물러남
키케로정치BC 63 · 공화정을 지키려다 죽은 로마 최고의 웅변가
BC 106 – BC 43

카틸리나의 음모를 폭로하고 안토니우스를 탄핵했다. 그의 라틴어 문장은 유럽 산문의 교과서가 됐다.

  • 집정관으로 카틸리나 음모 분쇄(BC 63)
  • 「국가론」「의무론」 등 철학·수사학 저작
  • 안토니우스 비판(필리피카)으로 처형
폼페이우스장군BC 60 · 카이사르와 맞선 로마의 「위대한」 장군
BC 106 – BC 48

지중해 해적을 석 달 만에 소탕하고 동방을 정복했으나, 삼두정치가 깨진 뒤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에게 졌다.

  • 지중해 해적 소탕(BC 67)
  • 미트리다테스 격파, 시리아·유대 병합
  • 파르살루스 패배 후 이집트에서 암살
사마천사상BC 91 · 치욕을 견디고 역사를 쓴 사람
BC 145 – BC 86

장군을 변호하다 궁형을 받았다. 죽는 대신 살아서 아버지가 시작한 역사를 끝냈다.

  • 「사기」 130권 — 3,000년을 다룬 통사
  • 기전체 — 이후 2,000년 동아시아 역사서의 형식
  • 「인간은 한 번 죽는데, 태산보다 무거울 수도 깃털보다 가벼울 수도 있다」

그 무렵의 사건

BC 100
옥저와 동예
고조선이 무너진 뒤 함경도·강원도 북부 동해안 지역에는 옥저와 동예라는 작은 나라들이 자리 잡았다. 둘 다 왕이 없이 각 읍락을 우두머리(읍군·삼로)가 다스렸다.
옥저는 소금과 해산물이 풍부해 고구려에 공물로 바쳤고, 신랑이 어릴 신부를 미리 데려가 키운 뒤 성인이 되면 정식 혼인하는 민며느리제라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동예는 다른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면 노비나 가축으로 배상하게 하는 책화라는 제도와, 매년 10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무천이라는 축제로 알려져 있다. 두 나라 모두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채 훗날 고구려에 흡수됐다.
BC 100
삼한(마한·진한·변한)
한반도 남부에는 마한·진한·변한이라는 작은 나라들의 연맹체가 자리했다. 이들을 통틀어 삼한이라 부르며, 훗날 각각 백제·신라·가야로 발전해 나갔다.
삼한은 각 소국마다 정치를 맡는 우두머리(신지·읍차 등)와,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이 따로 있는 제정 분리 사회였다. 천군이 다스리는 신성 구역인 소도에서는 죄인이 도망쳐 들어와도 함부로 잡아갈 수 없었다. 변한 지역은 철이 풍부해 낙랑·왜 등에 수출했으며, 이 철 생산 기반은 훗날 가야 연맹이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BC 44
카이사르 암살
원로원에서 살해됐다. 공화정 회복 대신 제국이 왔다.
공화정 회복을 노린 암살이 오히려 제정을 앞당겼다.
BC 27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가 첫 황제가 됐다. 200년의 로마 평화가 시작된다.
이후 200년간 지중해 전역에 큰 전쟁이 없었다. 도시와 도로와 수도교가 깔렸다.
BC 138
장건의 서역행
한 사람이 길을 열어 실크로드가 됐다.
한 무제가 흉노를 협공할 동맹을 찾아 장건을 보냈다. 13년 만에 돌아온 그는 동맹은 못 구했지만 서역의 나라들을 보고했고, 그 정보가 실크로드 교역의 시작이 됐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인도양 계절풍 항로BC 100 – 700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오간 것로마의 금화가 인도로 흘러가고 후추가 로마로 왔다. 로마 원로원이 금 유출을 걱정할 정도였다.
거점미오스호르모스 · 아덴 · 소코트라 · 무지리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전쟁 · BC 73 · 로마 vs 검투사·노예 연합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70여 명이 탈출했다. 이탈리아 각지의 노예가 합류해 12만이 됐다. 두 차례 집정관군을 꺾었으나 크라수스에게 진압됐다. 포로 6,000명이 아피아 가도에 십자가로 매달렸다.

【그때 그 자리】

기원전 1세기 로마는 정복의 결과를 감당하는 중이었다.

지중해를 얻자 노예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탈리아 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였다는 추정이 있다. 대농장에서 쇠사슬을 찬 채 일하고 밤에는 지하 감옥에 갇혔다.

검투사는 그중에서도 특수한 부류였다. 죽는 것을 구경거리로 삼는 경기를 위해 훈련받았다. 카푸아에 큰 검투사 양성소가 있었다.

앞서 두 차례 시칠리아에서 노예 반란이 있었다. 진압됐다.

【왜 그렇게 됐나】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전한다. 로마 보조군에 있다가 탈영해 붙잡혀 검투사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원전 73년 그는 동료 70여 명과 함께 주방 도구를 들고 탈출했다. 처음에는 그저 도망이었다.

베수비오산으로 올라갔다. 로마가 보낸 소규모 부대가 산길을 막았는데, 이들은 야생 포도 덩굴로 밧줄을 엮어 절벽을 타고 내려가 뒤를 쳤다.

이 승리가 알려지자 사람이 몰렸다. 농장의 노예와 목동들이 합류해 수만이 됐다.

【어떻게 흘렀나】

2년간 로마 군단을 여러 차례 깼다. 최대 7만에서 12만까지 불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목표를 두고 갈렸다. 알프스를 넘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쪽과 이탈리아에 남아 싸우자는 쪽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전자를 원했던 것으로 전하는데, 무리가 갈라져 일부가 남았고 그들이 먼저 격파됐다.

기원전 71년 크라수스가 진압을 맡았다. 그는 로마 최고의 부자였고 정치적 이름이 필요했다.

크라수스는 자기 군대에 십일조형을 부활시켰다. 도망친 부대의 병사 열 명 중 한 명을 제비뽑아 나머지가 때려죽이게 하는 벌이다. 자기 병사를 적보다 무섭게 만든 것이다.

남부로 몰린 반란군은 해적에게 배를 부탁했다가 배신당했다. 크라수스가 반도 남쪽을 참호로 가로막았다.

마지막 전투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죽었다. 시신은 찾지 못했다.

붙잡힌 6천 명이 카푸아에서 로마까지 아피아 가도 200킬로미터에 걸쳐 십자가에 매달렸다. 지나는 모든 사람이 보게 한 것이다.

【그래서】

크라수스는 이 공으로 집정관이 됐고 뒤에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와 삼두정치를 맺는다.

노예제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대농장주들이 노예를 지나치게 가혹하게 다루면 위험하다는 것을 배웠다는 지적이 있다.

【남은 것】

이 반란에 대한 기록은 모두 로마 쪽 것이다. 반란군 자신의 목소리는 한 줄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로마 기록자들이 스파르타쿠스를 높이 평가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지혜롭고 온화하며 그리스인다운 교양을 갖췄다고 적었다. 적을 그렇게 쓰는 경우는 드물다.

18세기 이후 이 이름이 되살아났다. 볼테르가 정당한 전쟁이라 했고, 마르크스가 고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라 불렀다. 1919년 독일 혁명의 스파르타쿠스단이 이 이름을 썼다.

1960년 커크 더글러스의 영화가 결정적이었다. 나는 스파르타쿠스라고 모두가 외치는 장면은 사료에 없는 창작이다. 이 영화의 각본가 돌턴 트럼보는 매카시즘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사람이다. 노예 반란 이야기가 20세기 미국의 정치적 탄압에 대한 발언으로 쓰인 것이다.

2천 년 전 진 사람이 계속 불려 나오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졌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보기: BC 1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갈리아 전쟁 카이사르 내전 고조선-한 전쟁 킴브리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