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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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공화정의 위기

로마가 지중해를 장악했지만 그 부가 공화정을 무너뜨렸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개혁이 유혈로 끝나고, 군벌들이 사병을 거느리며 내전이 반복됐다.

한반도

고조선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전쟁 2건

킴브리 전쟁BC 113 – BC 101
로마 vs 킴브리·테우토네스

북방 게르만 부족이 이주해 내려오며 로마군을 연달아 깨뜨렸다. 로마가 한니발 이후 처음으로 존망을 걱정했다.

아라우시오 BC 105아콰이 섹스티아이 BC 102베르켈라이 BC 101

결과마리우스가 군제를 갈아엎어 이겼다 — 재산 없는 시민도 병사로 받고 국가가 장비를 댔다. 군대가 국가가 아니라 장군에게 충성하게 된 시작이다.

12년 · 로마 군제의 전환
고조선-한 전쟁BC 109 – BC 108
고조선 vs 전한

고조선이 한과 남쪽 진국 사이의 중계 무역을 막고 사신을 살해하자, 흉노와 고조선이 손잡는 것을 우려한 한 무제가 원정을 결정했다.

패수 BC 109왕검성 포위 BC 109–108

결과1년의 농성 끝에 지배층 내분으로 왕검성이 함락됐다. 한사군이 설치된다.

1년 남짓 · 왕검성 농성 끝에 지배층 내분으로 함락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2명

사마천사상BC 91 · 치욕을 견디고 역사를 쓴 사람
BC 145 – BC 86

장군을 변호하다 궁형을 받았다. 죽는 대신 살아서 아버지가 시작한 역사를 끝냈다.

  • 「사기」 130권 — 3,000년을 다룬 통사
  • 기전체 — 이후 2,000년 동아시아 역사서의 형식
  • 「인간은 한 번 죽는데, 태산보다 무거울 수도 깃털보다 가벼울 수도 있다」
그라쿠스 형제정치BC 133 · 땅을 나누려다 맞아 죽었다
BC 168 – BC 121

정복으로 부자가 된 귀족이 농지를 독점하자 자영농이 사라졌다. 형제가 차례로 토지 개혁을 시도했다가 차례로 살해됐다.

  • 농지법 — 토지 소유 상한을 두려 함
  • 호민관 권한으로 원로원과 충돌
  • 둘 다 정치 폭력에 죽음 — 공화정 몰락의 신호

그 무렵의 사건

BC 100
옥저와 동예
고조선이 무너진 뒤 함경도·강원도 북부 동해안 지역에는 옥저와 동예라는 작은 나라들이 자리 잡았다. 둘 다 왕이 없이 각 읍락을 우두머리(읍군·삼로)가 다스렸다.
옥저는 소금과 해산물이 풍부해 고구려에 공물로 바쳤고, 신랑이 어릴 신부를 미리 데려가 키운 뒤 성인이 되면 정식 혼인하는 민며느리제라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동예는 다른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면 노비나 가축으로 배상하게 하는 책화라는 제도와, 매년 10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무천이라는 축제로 알려져 있다. 두 나라 모두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채 훗날 고구려에 흡수됐다.
BC 100
삼한(마한·진한·변한)
한반도 남부에는 마한·진한·변한이라는 작은 나라들의 연맹체가 자리했다. 이들을 통틀어 삼한이라 부르며, 훗날 각각 백제·신라·가야로 발전해 나갔다.
삼한은 각 소국마다 정치를 맡는 우두머리(신지·읍차 등)와,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이 따로 있는 제정 분리 사회였다. 천군이 다스리는 신성 구역인 소도에서는 죄인이 도망쳐 들어와도 함부로 잡아갈 수 없었다. 변한 지역은 철이 풍부해 낙랑·왜 등에 수출했으며, 이 철 생산 기반은 훗날 가야 연맹이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BC 138
장건의 서역행
한 사람이 길을 열어 실크로드가 됐다.
한 무제가 흉노를 협공할 동맹을 찾아 장건을 보냈다. 13년 만에 돌아온 그는 동맹은 못 구했지만 서역의 나라들을 보고했고, 그 정보가 실크로드 교역의 시작이 됐다.
BC 146
카르타고와 코린토스
같은 해에 두 도시가 지워졌다.
로마가 카르타고를 불태우고 몇 달 뒤 코린토스도 파괴했다. 지중해 서쪽과 동쪽의 마지막 경쟁자가 함께 사라진 해로, 로마의 지중해 지배가 여기서 확정된다.
BC 44
카이사르 암살
원로원에서 살해됐다. 공화정 회복 대신 제국이 왔다.
공화정 회복을 노린 암살이 오히려 제정을 앞당겼다.

교역로 2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고조선-한 전쟁

전쟁 · BC 109 · 고조선 vs 전한

고조선이 한과 남쪽 진국 사이의 중계 무역을 막고 사신을 살해하자, 흉노와 고조선이 손잡는 것을 우려한 한 무제가 원정을 결정했다. 1년의 농성 끝에 지배층 내분으로 왕검성이 함락됐다. 한사군이 설치된다.

【그때 그 자리】

기원전 2세기 고조선은 위만이 왕위를 잡은 뒤 철기를 받아들이며 커졌다. 서쪽으로 연나라와 다투다 밀린 적이 있었지만,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했다.

이 나라의 힘은 위치에서 나왔다. 한과 한반도 남쪽의 진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독점했다. 남쪽 나라들이 한과 직접 통하지 못하게 막고 이익을 챙겼다.

한은 무제 때였다. 흉노와 40년 넘게 싸우며 사방으로 뻗던 시기다. 서역으로 장건을 보내고 남쪽으로 남월을 정복했다.

【왜 그렇게 됐나】

한의 입장에서 고조선은 두 가지로 문제였다. 하나는 중계 무역을 막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흉노와 손잡을 가능성이었다. 실제로 한 무제는 고조선이 흉노의 왼팔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기원전 109년 한이 사신 섭하를 보내 우거왕에게 입조를 요구했다. 거절당하자 섭하는 돌아가는 길에 배웅 나온 고조선 장수를 죽이고 도망쳤다. 한은 그를 벌하기는커녕 요동 지역 관리로 임명했다. 우거왕이 군사를 보내 섭하를 죽였다. 이것이 개전 명분이 됐다.

【어떻게 흘렀나】

기원전 109년 가을 한이 두 방향으로 왔다. 양복이 수군 5만을 이끌고 산둥에서 바다를 건너고, 순체가 육군을 이끌고 요동에서 들어왔다.

고조선은 잘 버텼다. 양복의 수군이 먼저 도착해 성급히 공격했다가 크게 졌다. 순체의 육군도 패수에서 막혔다.

한의 지휘부가 어지러웠다. 두 장수가 서로 공을 다투고 협조하지 않았다. 화친 협상 중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다. 무제가 보낸 공손수는 순체의 말만 듣고 양복을 체포했다가 자기가 처형됐다. 뒤에 순체도 처형되고 양복은 서인이 됐다. 이긴 쪽 장수들이 모두 벌을 받은 드문 경우다.

1년을 버텼다. 그런데 안에서 갈라졌다.

조선상 노인과 한음, 니계상 참 같은 대신들이 항복을 주장하다 한으로 넘어갔다. 기원전 108년 여름 니계상 참이 사람을 보내 우거왕을 죽였다. 그래도 대신 성기가 계속 저항하자 왕자 장과 노인의 아들이 성기를 죽였다.

왕검성이 무너졌다.

【그래서】

한은 낙랑·임둔·진번·현도 네 군을 두었다. 이 가운데 셋은 오래 못 가고 낙랑만 313년까지 400년 넘게 존속했다.

낙랑은 중국 문물이 한반도로 들어오는 통로가 됐다. 이 시기에 남부로 철기가 퍼지고 삼한이 자란다.

【남은 것】

밖의 힘보다 안의 분열이 먼저였다는 점이 이 전쟁의 핵심이다. 1년을 버틴 나라가 대신들의 배신으로 끝났다. 668년 고구려도 같은 방식으로 무너진다.

낙랑군의 위치를 두고 논쟁이 있다. 평양 일대로 보는 것이 학계 다수설이고, 발굴된 무덤과 유물이 근거다. 요서에 있었다는 주장도 오래 제기돼 왔으나 고고학적 뒷받침이 부족하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 논쟁이 뜨거운 이유는 식민사학과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일제가 낙랑군을 강조해 한국사가 처음부터 외부 지배로 시작했다고 서술한 역사가 있다. 다만 그 반작용으로 자료를 무시하는 것도 역사가 아니다. 낙랑이 있었다는 것과 한국사가 그것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지도에서 보기: BC 2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킴브리 전쟁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제3차 포에니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