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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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이동

그 해의 정치

공화정의 위기

로마가 지중해를 장악했지만 그 부가 공화정을 무너뜨렸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개혁이 유혈로 끝나고, 군벌들이 사병을 거느리며 내전이 반복됐다.

한반도

한사군과 열국

고조선이 무너지고 한의 군현이 설치됐다. 저항 속에서 부여·옥저·동예 같은 정치체가 자라났다.

전쟁 1건

갈리아 전쟁BC 58 – BC 50
로마 vs 갈리아 부족 연합

카이사르에게는 정치 자금과 군사적 명성이 절실했다. 헬베티족의 이동과 게르만의 압박을 명분 삼아 갈리아 전역으로 전선을 넓혔다.

비브락테 BC 58게르고비아 BC 52알레시아 BC 52

결과알레시아에서 베르킨게토릭스가 항복했다. 카이사르는 이 군대로 로마를 차지한다.

8년 · 카이사르 자신의 기록으로 100만 사망·100만 노예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5명

폼페이우스장군BC 60 · 카이사르와 맞선 로마의 「위대한」 장군
BC 106 – BC 48

지중해 해적을 석 달 만에 소탕하고 동방을 정복했으나, 삼두정치가 깨진 뒤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에게 졌다.

  • 지중해 해적 소탕(BC 67)
  • 미트리다테스 격파, 시리아·유대 병합
  • 파르살루스 패배 후 이집트에서 암살
키케로정치BC 63 · 공화정을 지키려다 죽은 로마 최고의 웅변가
BC 106 – BC 43

카틸리나의 음모를 폭로하고 안토니우스를 탄핵했다. 그의 라틴어 문장은 유럽 산문의 교과서가 됐다.

  • 집정관으로 카틸리나 음모 분쇄(BC 63)
  • 「국가론」「의무론」 등 철학·수사학 저작
  • 안토니우스 비판(필리피카)으로 처형
카이사르정치BC 44 · 종신 독재관
BC 100 – BC 44

갈리아를 정복한 군대로 로마를 차지했다. 공화정을 끝냈고 원로원에서 살해됐다.

  • 갈리아 정복
  • 루비콘을 건너 내전에서 승리
  • 율리우스력 도입
클레오파트라정치BC 41 ·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은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
BC 69 – BC 30, 재위 BC 51 – BC 30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300년의 마지막 통치자. 로마의 힘을 빌려 왕국을 지키려 했으나 악티움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카이사르와 동맹, 아들 카이사리온
  • 안토니우스와 동방 재편
  • 악티움 패배 후 자결, 이집트의 로마 속주화
술라장군BC 82 · 로마로 군대를 몰고 온 첫 사람
BC 138 – BC 78

자기 군대를 이끌고 로마 시내로 진군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처음 넘었고, 이후 카이사르가 같은 길을 간다.

  • 로마 진군 BC 88 — 전례가 됨
  • 살생부로 정적 수천 명 처형
  • 독재관이 됐다가 스스로 물러남

그 무렵의 사건

BC 44
카이사르 암살
원로원에서 살해됐다. 공화정 회복 대신 제국이 왔다.
공화정 회복을 노린 암살이 오히려 제정을 앞당겼다.
BC 27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가 첫 황제가 됐다. 200년의 로마 평화가 시작된다.
이후 200년간 지중해 전역에 큰 전쟁이 없었다. 도시와 도로와 수도교가 깔렸다.
BC 100
옥저와 동예
고조선이 무너진 뒤 함경도·강원도 북부 동해안 지역에는 옥저와 동예라는 작은 나라들이 자리 잡았다. 둘 다 왕이 없이 각 읍락을 우두머리(읍군·삼로)가 다스렸다.
옥저는 소금과 해산물이 풍부해 고구려에 공물로 바쳤고, 신랑이 어릴 신부를 미리 데려가 키운 뒤 성인이 되면 정식 혼인하는 민며느리제라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동예는 다른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면 노비나 가축으로 배상하게 하는 책화라는 제도와, 매년 10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무천이라는 축제로 알려져 있다. 두 나라 모두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채 훗날 고구려에 흡수됐다.
BC 100
삼한(마한·진한·변한)
한반도 남부에는 마한·진한·변한이라는 작은 나라들의 연맹체가 자리했다. 이들을 통틀어 삼한이라 부르며, 훗날 각각 백제·신라·가야로 발전해 나갔다.
삼한은 각 소국마다 정치를 맡는 우두머리(신지·읍차 등)와,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이 따로 있는 제정 분리 사회였다. 천군이 다스리는 신성 구역인 소도에서는 죄인이 도망쳐 들어와도 함부로 잡아갈 수 없었다. 변한 지역은 철이 풍부해 낙랑·왜 등에 수출했으며, 이 철 생산 기반은 훗날 가야 연맹이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인도양 계절풍 항로BC 100 – 700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오간 것로마의 금화가 인도로 흘러가고 후추가 로마로 왔다. 로마 원로원이 금 유출을 걱정할 정도였다.
거점미오스호르모스 · 아덴 · 소코트라 · 무지리스

갈리아 전쟁

전쟁 · BC 58 · 8년, 그리고 그 기록

카이사르에게는 정치 자금과 군사적 명성이 절실했다. 헬베티족의 이동과 게르만의 압박을 명분 삼아 갈리아 전역으로 전선을 넓혔다. 알레시아에서 베르킨게토릭스가 항복했다. 카이사르는 이 군대로 로마를 차지한다.

【그때 그 자리】 BC 58년이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이 됐다.

빚이 많았다. 정치 자금을 빌려 쓴 것이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에 비해 군사적 명성이 없었다.

전쟁이 필요했다.

【왜 그렇게 됐나】 명분은 있었다.

헬베티족이 지금의 스위스에서 서쪽으로 이주하려 했다. 36만 명이 움직였다.

로마의 동맹 부족들이 도움을 청했다. 카이사르가 막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냈다.

이어 게르만의 아리오비스투스를 라인강 너머로 밀어냈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갈리아 전체로 갔다.

【어떻게 흘렀나】 8년이 걸렸다.

라인강에 다리를 열흘 만에 놓고 건너가 시위한 뒤 돌아왔다. 다리를 부수고 왔다 —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다는 뜻이다.

브리타니아에 두 번 건너갔다.

가장 큰 고비가 BC 52년 베르킹게토릭스의 봉기다.

갈리아 부족들이 처음으로 하나로 뭉쳤다. 그가 청야 전술을 썼다 — 자기 마을을 태워 로마군이 먹을 것을 없앴다.

알레시아에서 결판이 났다.

카이사르가 성을 둘러싸는 성벽 16km를 쌓았다. 그리고 그 바깥에 다시 성벽 21km를 쌓았다 — 밖에서 오는 갈리아 구원군을 막기 위해서다.

포위한 군대가 스스로 포위된 상태로 싸웠다. 안쪽에 8만, 바깥쪽에 25만이 있었고 로마군은 6만이었다.

이겼다. 베르킹게토릭스가 말을 타고 나와 무기를 발밑에 내려놓았다.

【그래서】 사망자 100만, 노예로 팔린 사람 100만이라는 숫자가 고대 사료에 나온다. 과장이 있겠으나 규모는 짐작된다.

카토가 원로원에서 카이사르를 전쟁 범죄로 갈리아인들에게 넘기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남은 것】 「갈리아 전기」가 남았다.

카이사르가 직접 썼다. 겨울마다 로마로 보냈다 — 원로원과 시민에게 자기 업적을 알리는 정치 문서였다.

3인칭으로 썼다. 「카이사르는 …했다」는 식이다. 자기 이야기인데 객관적으로 보이게 하는 장치다.

문장이 간결해 라틴어 교재의 표준이 됐다. 「갈리아 전체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는 첫 문장을 유럽 학생들이 대대로 외웠다.

그리고 정복이 실제로 남았다. 갈리아가 로마화됐고, 그 언어가 프랑스어가 됐다.

베르킹게토릭스는 로마로 끌려가 6년을 갇혔다가 개선식 뒤 처형됐다.

19세기 프랑스에서 그가 민족 영웅으로 되살아났다. 나폴레옹 3세가 알레시아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지도에서 보기: BC 1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카이사르 내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악티움 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