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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로마가 지중해를 장악했지만 그 부가 공화정을 무너뜨렸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개혁이 유혈로 끝나고, 군벌들이 사병을 거느리며 내전이 반복됐다.
신라·고구려·백제가 차례로 서고 가야가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았다. 아직 연맹왕국 단계로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
왜카이사르 사후 로마를 나눠 가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충돌했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손잡자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동방에 넘어간 로마인'으로 몰았다.
결과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패해 자결했다. 이듬해 이집트가 속주가 된다.
공화정의 외피를 남긴 채 1인 지배를 세웠다. 200년의 로마 평화가 여기서 시작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300년의 마지막 통치자. 로마의 힘을 빌려 왕국을 지키려 했으나 악티움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갈리아를 정복한 군대로 로마를 차지했다. 공화정을 끝냈고 원로원에서 살해됐다.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가 로마의 조상이 된다는 이야기로 아우구스투스의 새 질서에 신화를 입혔다. 단테는 그를 저승길 안내자로 삼았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전쟁 · BC 32 · 옥타비아누스 vs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 사후 로마를 나눠 가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충돌했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손잡자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동방에 넘어간 로마인'으로 몰았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패해 자결했다. 이듬해 이집트가 속주가 된다.
【그때 그 자리】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로마는 다시 내전에 들어갔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가 2차 삼두정치를 맺고 암살자들을 쫓았다. 기원전 42년 필리피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꺾었다.
그다음은 셋이 나눠 가졌다. 옥타비아누스가 서쪽, 안토니우스가 동쪽, 레피두스가 아프리카를 맡았다. 레피두스는 곧 밀려났다.
둘이 남으면 부딪친다.
【왜 그렇게 됐나】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부하 중 가장 유능한 장군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서른도 안 된 젊은이였고 몸이 약해 전장에서 자주 앓았다.
군사적으로는 안토니우스가 앞섰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아그리파라는 뛰어난 지휘관이 있었고, 무엇보다 여론을 쓰는 법을 알았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지내며 로마 영토를 그 자식들에게 나눠 줬다는 소식이 로마에 퍼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신전에서 강제로 꺼내 공개했다. 이집트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이로써 구도가 바뀌었다. 로마인끼리의 내전이 아니라 로마와 이집트 여왕의 싸움이 됐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했다. 안토니우스의 이름은 넣지 않았다.
【어떻게 흘렀나】
기원전 31년 9월 2일 그리스 서안 악티움 앞바다에서 맞붙었다.
안토니우스의 함선은 크고 무거웠다. 옥타비아누스 쪽은 작고 빨랐다.
싸움의 실상은 그전에 결정됐다. 아그리파가 해상 보급로를 끊어 안토니우스 진영은 굶주리고 말라리아가 돌았다. 탈영이 이어졌다.
전투 중에 클레오파트라의 함대 60척이 전선을 빠져나갔다. 안토니우스가 뒤따랐다. 남은 함대가 무너졌다.
이 이탈을 배신으로 볼 것인가 미리 정한 탈출 계획으로 볼 것인가는 논쟁이 있다.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함대를 보존해 이집트로 물러나려 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이듬해 옥타비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왔다. 안토니우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클레오파트라도 뒤따랐다. 독사에게 물렸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확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집트가 로마의 속주가 됐다. 3천 년 파라오의 역사가 끝났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300년도 함께 끝났다.
이집트의 곡물이 로마로 갔다. 이 곡물이 로마 시민에게 무상 배급되면서 황제의 통치 기반이 됐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됐다. 공화정이 끝나고 제정이 시작됐다. 이후 200년이 팍스 로마나다.
【남은 것】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부 로마 쪽 것이다. 승자가 만든 이미지가 2천 년을 갔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이집트어를 배운 첫 통치자였고 여러 언어를 했다. 나라를 지키려 당대 가장 강한 자와 손잡는 전략을 두 번 썼다. 두 번째가 실패했다.
미모로 나라를 팔았다는 서술과, 마지막까지 이집트의 독립을 지키려 한 정치가였다는 서술이 지금 함께 있다.
파스칼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얼굴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썼다. 이 문장이 오래 인용되는데, 정작 그가 진 이유는 코가 아니라 보급이었다.
지도에서 보기: BC 1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카이사르 내전 로마의 게르마니아 원정 갈리아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