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투어 · 아무 곳이나 누르면 멈춤
지도에 표시
지도는 휠·더블클릭·드래그 · PgUp/PgDn은 스냅샷 이동
게이지를 Shift+드래그하면 10배 정밀 · 오른쪽 눈금은 인물·전쟁·사건이 있는 자리
틀린 데나 빠진 데를 알려주시면 확인하고 고칩니다.
이 브라우저에만 저장됩니다. 서버로 아무것도 보내지 않습니다.
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유럽 대부분이 절대군주의 궁정 정치로 움직였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전쟁이 반복됐고, 그 아래 살롱과 백과전서에서 왕권을 의심하는 사상이 자랐다.
세도정치와 삼정 문란이 겹쳤다. 서양 선박이 연안에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문을 닫아걸었다.
왜오스만이 빈을 두 번째로 포위했다. 유럽 각국이 교황의 중재로 신성동맹을 맺었다.
결과폴란드 기병의 돌격으로 포위가 풀렸고,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오스만이 헝가리를 잃었다. 오스만의 팽창이 여기서 멈추고 이후 200년의 후퇴가 시작된다.
왜발트해 패권을 쥔 스웨덴을 러시아·덴마크·폴란드가 함께 노렸다. 젊은 표트르에게는 바다로 나가는 항구가 절실했다.
결과러시아가 스웨덴을 꺾고 발트해의 강자가 됐다. 표트르 대제의 제국이 여기서 시작된다.
왜합스부르크 에스파냐 왕이 후사 없이 죽으며 프랑스 왕손에게 왕위를 넘겼다.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한 집안이 되는 것을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막으려 했다.
결과유럽 전체가 에스파냐 왕좌를 두고 싸웠다. 영국이 지브롤터를 얻었다.
흩어진 아칸족 도시들을 쿠마시를 중심으로 통합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황금 의자가 지금도 왕권의 상징이다.
직접 서유럽에서 조선술을 배워왔다. 늪지에 새 수도를 세우고 바다로 나갔다.
8세에 즉위해 61년을 다스렸다. 타이완을 얻고 러시아와 국경을 정했으며 서양 선교사에게 수학을 배웠다.
정부는 생명·자유·재산을 지키기 위한 계약이고, 이를 어기면 국민은 저항할 수 있다. 미국 독립선언은 그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겼다.
하늘과 땅이 같은 법칙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수식으로 보였다.
뉴턴과 별개로 미적분을 완성하다
오스만이 빈을 두 달째 포위했을 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이 날개 단 기병을 이끌고 언덕에서 내려왔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 돌격으로 꼽힌다.
라이프치히 교회의 음악 감독으로 매주 칸타타를 썼다. 살아서는 오르간 연주자로 유명했고 죽은 뒤 백 년 만에 「음악의 아버지」가 됐다.
바스쿠 다 가마 이후 400년.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 닿는 길이 열리며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밀려났다.
유럽의 공산품 → 아프리카의 노예 → 아메리카의 설탕·면화 → 유럽. 세 대륙이 하나의 경제로 묶였다.
전쟁 · 1701 · 합스부르크가 대를 잇지 못해 난 전쟁
합스부르크 에스파냐 왕이 후사 없이 죽으며 프랑스 왕손에게 왕위를 넘겼다.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한 집안이 되는 것을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막으려 했다. 유럽 전체가 에스파냐 왕좌를 두고 싸웠다. 영국이 지브롤터를 얻었다.
【그때 그 자리】 1700년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2세가 죽었다.
후사가 없었다. 몸이 약했고 오래 병을 앓았다 — 「마법에 걸린 왕」이라 불렸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대대로 근친혼을 반복한 결과라는 것이 지금의 설명이다. 그의 근친 계수는 남매 사이에서 난 아이보다 높았다.
【왜 그렇게 됐나】 에스파냐 왕위에 딸린 것이 컸다.
본토뿐 아니라 남아메리카 식민지, 나폴리와 시칠리아, 밀라노, 그리고 지금의 벨기에가 함께였다.
그것을 누가 가져가느냐로 유럽의 균형이 정해진다.
주장자가 둘이었다.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프, 그리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카를이다.
카를로스 2세가 유언에서 필리프를 지명했다. 에스파냐가 쪼개지지 않게 하려는 선택이었다.
루이 14세가 받아들였다. 그리고 필리프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시키지 않았다.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한 사람 아래 합쳐질 수 있다는 뜻이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어떻게 흘렀나】 13년을 싸웠다. 유럽 전역과 아메리카까지 번졌다.
말버러 공작과 사보이 공 외젠이 동맹군을 이끌었다.
1704년 블렌하임에서 프랑스군을 크게 깼다. 루이 14세가 40년 만에 처음 당한 대패다.
1709년 말플라케는 이겼는데 사상자가 더 많았다. 「승리라 부르기 어려운 승리」의 사례로 인용된다.
1704년 영국이 지브롤터를 점령했다. 그 뒤 지금까지 영국령이다.
그런데 1711년 판이 바뀌었다.
오스트리아 후보 카를이 형의 죽음으로 신성로마 황제가 됐다.
그가 에스파냐까지 가지면 카를 5세 때의 거대한 제국이 되살아난다. 영국이 그것도 원하지 않았다.
영국이 협상으로 돌아섰다.
【그래서】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이다.
필리프가 에스파냐 왕이 되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두 왕관을 한 사람이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영토와 남네덜란드를 받았다.
영국이 지브롤터와 미노르카, 그리고 아메리카의 노예 무역 독점권(아시엔토)을 얻었다.
【남은 것】 이 조약이 「세력 균형」을 명문화한 첫 사례로 꼽힌다.
어느 한 나라가 압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유럽 질서의 원칙이 됐다.
프랑스의 우위가 끝났다. 루이 14세는 2년 뒤 죽으며 증손자에게 말했다고 전한다. 「나처럼 건축과 전쟁을 좋아하지 마라.」
영국이 해상 패권으로 올라섰다.
에스파냐에서는 부르봉 왕조가 시작됐다. 지금 스페인 국왕이 그 후손이다.
카탈루냐가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가 1714년 바르셀로나 함락으로 자치권을 잃었다. 그날 9월 11일이 지금 카탈루냐의 기념일이다.
지도에서 보기: 17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대북방전쟁 대튀르크 전쟁 빈 공방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