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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절대왕정과 계몽

유럽 대부분이 절대군주의 궁정 정치로 움직였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전쟁이 반복됐고, 그 아래 살롱과 백과전서에서 왕권을 의심하는 사상이 자랐다.

한반도

조선 후기

세도정치와 삼정 문란이 겹쳤다. 서양 선박이 연안에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문을 닫아걸었다.

전쟁 3건

대튀르크 전쟁1683 – 1699
신성동맹 vs 오스만

오스만이 빈을 두 번째로 포위했다. 유럽 각국이 교황의 중재로 신성동맹을 맺었다.

빈 공방 1683젠타 1697

결과폴란드 기병의 돌격으로 포위가 풀렸고,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오스만이 헝가리를 잃었다. 오스만의 팽창이 여기서 멈추고 이후 200년의 후퇴가 시작된다.

16년 · 오스만 팽창의 끝
대북방전쟁1700 – 1721
러시아·덴마크·폴란드 vs 스웨덴

발트해 패권을 쥔 스웨덴을 러시아·덴마크·폴란드가 함께 노렸다. 젊은 표트르에게는 바다로 나가는 항구가 절실했다.

나르바 1700폴타바 1709

결과러시아가 스웨덴을 꺾고 발트해의 강자가 됐다. 표트르 대제의 제국이 여기서 시작된다.

21년 · 스웨덴이 강대국 지위를 잃었다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1701 – 1714
프랑스·에스파냐 vs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

합스부르크 에스파냐 왕이 후사 없이 죽으며 프랑스 왕손에게 왕위를 넘겼다.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한 집안이 되는 것을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막으려 했다.

블렌하임 1704라미이 1706말플라케 1709

결과유럽 전체가 에스파냐 왕좌를 두고 싸웠다. 영국이 지브롤터를 얻었다.

13년 · 영국이 지브롤터를 얻었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8명

표트르 대제정치1700 · 러시아 차르
1672 – 1725

직접 서유럽에서 조선술을 배워왔다. 늪지에 새 수도를 세우고 바다로 나갔다.

  • 서유럽에서 직접 기술을 배워옴
  •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 대북방전쟁 승리
오세이 투투정치1701 · 아샨티를 하나로 묶은 왕
1660?년 무렵 – 1717

흩어진 아칸족 도시들을 쿠마시를 중심으로 통합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황금 의자가 지금도 왕권의 상징이다.

  • 사제 오콤포 아녜에와 함께 아샨티 동맹 결성
  • 황금 의자(시카 드와)를 나라의 영혼으로 선포
  • 금 무역로를 장악해 아샨티를 서아프리카 강국으로
강희제정치1690 ·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청의 전성기를 연 황제
1654 – 1722, 재위 1661 – 1722

8세에 즉위해 61년을 다스렸다. 타이완을 얻고 러시아와 국경을 정했으며 서양 선교사에게 수학을 배웠다.

  • 삼번의 난 평정(1681), 타이완 정복(1683)
  • 네르친스크 조약(1689)
  • 준가르 원정, 「강희자전」 편찬
로크사상1690 · 자유주의의 아버지, 「통치론」의 저자
1632 – 1704

정부는 생명·자유·재산을 지키기 위한 계약이고, 이를 어기면 국민은 저항할 수 있다. 미국 독립선언은 그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겼다.

  • 「통치론」「인간지성론」(1690)
  • 자연권·사회계약·저항권 이론
  • 「관용에 관한 편지」
뉴턴과학1687 · 자연철학자
1643 – 1727

하늘과 땅이 같은 법칙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수식으로 보였다.

  • 만유인력과 운동 법칙
  • 「프린키피아」 1687
  • 미적분과 광학
라이프니츠과학1684 · 수학자·철학자
1646 – 1716

뉴턴과 별개로 미적분을 완성하다

  • 미적분 독자 발견·발표 1684
  • 지금 쓰는 미적분 표기법 고안
  • 뉴턴과 우선권 논쟁
얀 3세 소비에스키장군1683 · 빈을 구한 왕
1629 – 1696

오스만이 빈을 두 달째 포위했을 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이 날개 단 기병을 이끌고 언덕에서 내려왔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 돌격으로 꼽힌다.

  • 1683년 빈 구원
  • 날개 기병 후사르 3천
  • 오스만의 유럽 진출이 여기서 꺾였다
바흐예술1723 · 「마태 수난곡」의 작곡가, 음악의 아버지
1685 – 1750

라이프치히 교회의 음악 감독으로 매주 칸타타를 썼다. 살아서는 오르간 연주자로 유명했고 죽은 뒤 백 년 만에 「음악의 아버지」가 됐다.

  • 「브란덴부르크 협주곡」「평균율 클라비어」
  • 「마태 수난곡」(1727)
  • 「푸가의 기법」 — 대위법의 완성

그 무렵의 사건

1701
아샨티 제국
1701년 오세이 투투가 세운 아샨티 제국은 금 무역으로 번영하며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로 성장했으나, 19세기 말 영국과의 거듭된 전쟁 끝에 식민 지배 아래 놓였다.
건국자 오세이 투투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황금 의자('황금 스툴')를 왕권의 상징으로 삼아 여러 부족을 하나의 연합체로 묶었다. 이 의자는 오늘날까지도 아샨티 왕권의 신성한 상징으로 여겨진다. 아샨티는 풍부한 금광과 노예무역으로 큰 부를 쌓았으나, 19세기 들어 이권을 노린 영국과 다섯 차례에 걸친 전쟁(영국-아샨티 전쟁)을 치렀다. 1900년 마지막 전쟁에서 패배하며 결국 영국의 보호령으로 편입됐다.
1688
명예혁명
1688~89년, 잉글랜드 의회가 가톨릭 왕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그의 딸 메리와 사위 윌리엄을 공동 왕으로 앉혔다. 유혈 충돌 없이 이뤄졌다.
이듬해 권리장전이 제정되며 의회가 왕권 위에 있다는 원칙이 확립됐다.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 넘어가는 결정적 전환점으로 꼽힌다.
1725
영조의 탕평책
영조는 붕당 간 극심한 대립으로 정치가 마비되자,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숙종 때부터 격화된 붕당 간의 당쟁은 상대 당을 완전히 몰락시키는 환국 정치로까지 치달아 정치 기강이 크게 흔들렸다. 이 와중에 왕위에 오른 영조는 자신의 즉위 과정에서도 붕당의 다툼에 시달렸던 만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각 붕당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워 이 원칙을 널리 알리고, 붕당의 뿌리인 서원을 대거 정리하며 이조 전랑의 권한도 축소했다. 영조의 탕평책으로 극단적인 당쟁은 상당히 진정되었으며, 이 흐름은 손자인 정조에게로 이어져 조선 후기 정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1750
균역법 시행
영조는 백성이 부담하던 군포를 절반으로 줄이는 균역법을 시행해 군역의 폐단을 완화했다.
조선의 양인 남성은 군역 대신 군포(베 2필)를 바쳐야 했는데, 군적이 문란해지면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갓난아이에게까지 군포를 매기는 백골징포·황구첨정 같은 폐단이 만연했다. 영조는 1750년 균역법을 시행해 군포 부담을 종전의 절반인 1필로 줄였다. 이로 인해 줄어든 국가 재정은 지주에게 걷는 결작(토지에 매기는 세금)과 어업세·소금세 등 잡세로 메우도록 했다. 균역법은 백성의 부담을 다소 덜어주었지만 근본적인 군적 문란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해, 조선 후기까지 군포 관련 폐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1648
베스트팔렌 조약
종교가 아니라 주권이 국제 질서의 단위가 됐다.
종교가 아니라 주권이 국제 질서의 단위가 됐다. 지금 국가 체제의 기원이다.
1755
리스본 대지진
만성절 아침 지진·쓰나미·화재가 리스본을 지웠다. 「신은 왜 허락했는가」가 계몽사상의 질문이 됐다.
11월 1일 미사 시간에 규모 8.5로 추정되는 지진이 덮쳤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강가로 피하자 쓰나미가 왔고 촛불이 도시를 닷새 동안 태웠다. 인구 20만 중 3만에서 5만이 죽었다. 재상 폼발은 「죽은 자를 묻고 산 자를 먹이라」며 격자형 내진 도시를 다시 세웠고, 볼테르는 「캉디드」로 낙관론을 비웃었다. 근대 지진학의 출발점이다.

교역로 2개

희망봉 항로1500 – 1900

바스쿠 다 가마 이후 400년.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 닿는 길이 열리며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밀려났다.

오간 것후추와 면직물, 그리고 나중엔 차와 아편. 지중해를 거치지 않는 길이 베네치아와 오스만을 밀어냈다.
거점리스본 · 카나리아 · 희망봉 · 모잠비크 · 고아 · 말라카
대서양 삼각무역1600 – 1850

유럽의 공산품 → 아프리카의 노예 → 아메리카의 설탕·면화 → 유럽. 세 대륙이 하나의 경제로 묶였다.

오간 것유럽의 총기·직물 → 아프리카의 노예 → 아메리카의 설탕·면화. 1,200만 명이 대서양을 건넜다.
거점리버풀 · 리스본 · 기니만 · 카리브 · 버지니아

대북방전쟁

전쟁 · 1700 · 스웨덴 제국이 끝나고 러시아가 나타나다

발트해 패권을 쥔 스웨덴을 러시아·덴마크·폴란드가 함께 노렸다. 젊은 표트르에게는 바다로 나가는 항구가 절실했다. 러시아가 스웨덴을 꺾고 발트해의 강자가 됐다. 표트르 대제의 제국이 여기서 시작된다.

【그때 그 자리】 1700년이다. 발트해는 스웨덴의 호수였다.

30년 전쟁 이후 스웨덴이 발트 연안을 거의 다 쥐었다. 핀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독일 북부 일부다.

인구는 적었다. 200만이 안 됐다. 그런데 군대가 강했다.

1697년 열다섯 살 카를 12세가 즉위했다.

【왜 그렇게 됐나】 어린 왕이라 만만해 보였다.

러시아의 표트르 1세, 덴마크, 폴란드-작센이 손잡고 동시에 쳤다.

표트르에게는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러시아에 얼지 않는 항구가 없었다.

서유럽으로 가는 바닷길이 필요했다.

【어떻게 흘렀나】 처음에는 카를 12세가 압도했다.

덴마크를 몇 주 만에 굴복시켰다.

1700년 나르바에서 러시아군 4만을 8천으로 깼다. 눈보라를 등지고 돌격했다.

폴란드로 가서 왕을 갈아 치웠다.

그 6년 동안 표트르가 군대를 다시 만들었다. 교회 종을 녹여 대포를 만들었다.

그리고 1703년 네바강 어귀 늪지에 도시를 세우기 시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다.

1708년 카를 12세가 러시아로 들어갔다.

모스크바로 가려다 방향을 남쪽 우크라이나로 틀었다. 코사크의 마제파가 합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청야 전술을 썼다. 곡식과 마을을 태우며 물러났다.

그해 겨울이 300년 만의 혹한이었다. 스웨덴군이 얼어 죽었다. 병력이 절반으로 줄었다.

1709년 폴타바에서 결판이 났다. 카를 12세는 부상으로 들것에 실려 지휘했다.

궤멸했다. 왕은 오스만으로 달아나 5년을 머물렀다.

【그래서】 1721년 니스타드 조약으로 끝났다. 21년 전쟁이다.

스웨덴이 발트 연안 영토를 거의 다 잃었다. 강대국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해 표트르가 「임페라토르(황제)」를 칭했다. 러시아 제국의 시작이다.

【남은 것】 유럽의 세력 판도가 바뀌었다.

그때까지 유럽 정치에서 러시아는 변두리였다. 이 전쟁 뒤 주요 행위자가 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유럽으로 난 창」이 됐다. 늪을 메우며 수만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카를 12세는 1718년 노르웨이 원정 중 참호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서른여섯이었다.

적의 탄인지 자기편의 암살인지 지금도 논쟁이다. 유해를 여러 번 발굴해 조사했다.

스웨덴이 그 뒤 대륙 정치에서 물러났다. 200년 넘게 전쟁을 하지 않은 나라가 됐다.

볼테르가 카를 12세의 전기를 썼다. 재능과 용기를 낭비한 사례로 그렸다.

지도에서 보기: 17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대튀르크 전쟁 빈 공방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