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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새 종교가 100년 만에 이베리아부터 인더스까지를 하나의 정치권으로 묶었다. 사산조는 사라지고 동로마는 영토의 절반을 잃었다.
신라가 당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을 통일했고 북쪽에는 발해가 섰다. 신라 말 호족이 일어나며 후삼국으로 갈라진다.
왜우마이야의 세습 칼리파 야지드 1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은 후세인이 지지자를 모아 쿠파로 향하던 중, 카르발라에서 우마이야 군대에 포위됐다.
결과물과 식량이 끊긴 채 열흘을 버틴 후세인과 일행 70여 명은 결국 전멸했다. 후세인의 순교는 이슬람력 무하람월 10일(아슈라)에 일어나, 시아파에게 가장 중요한 추모일이 됐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이자 4대 칼리파 알리의 아들. 우마이야 칼리파 야지드 1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다 카르발라에서 소수의 지지자와 함께 전멸했다.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약속을 어긴 당을 다시 몰아냈다. 죽어서 용이 되어 바다를 지키겠다며 동해에 묻혔다.
당나라에 유학해 화엄 사상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에 화엄종을 열었다.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을 세우며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후궁에서 시작해 황후가 되고 끝내 스스로 황제가 됐다. 나라 이름까지 주(周)로 바꿨다.
당으로 가던 길에 해골물을 마시고 돌아섰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깨달음이다. 이후 시장과 마을을 돌며 글 모르는 사람에게 불교를 전했다.
당의 강제 이주지에서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빠져나갔다. 천문령에서 추격군을 꺾고 동모산에 나라를 세웠다.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신라군을 이끌어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황산벌에서 5천으로 신라 5만을 맞았다. 네 번 이기고 다섯 번째에 무너졌다. 떠나기 전 자기 가족을 죽였다고 전한다.
딸이 죽은 대야성 함락 뒤 고구려와 일본을 거쳐 당으로 갔다. 진골로서 처음 왕이 됐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인물 · 680 · 열흘의 포위, 그리고 순교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이자 4대 칼리파 알리의 아들. 우마이야 칼리파 야지드 1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다 카르발라에서 소수의 지지자와 함께 전멸했다.
그때 그 자리: 680년, 우마이야 칼리파 야지드 1세가 세습으로 즉위하자, 예언자의 외손자 후세인은 그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지지 세력이 있다고 알려진 쿠파로 향했다.
왜 그렇게 됐나: 초기 이슬람 공동체는 지도자를 합의로 선출했는데, 우마이야 왕조가 이를 세습제로 바꾸자 많은 이들이 이를 이슬람 원칙에서 벗어난 것으로 봤다. 후세인은 이 흐름에 맞서는 상징적 인물이 됐다.
어떻게 흘렀나: 그러나 쿠파의 지지 세력은 결집하지 못했고, 후세인과 약 70여 명의 일행은 카르발라에서 우마이야 군대에 포위됐다. 물과 식량이 끊긴 채 열흘을 버텼지만(무하람월 1일부터 10일까지) 결국 전멸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이슬람력 무하람월 10일, 즉 아슈라에 일어났다. 이날은 시아파에게 가장 중요한 추모일이 됐다.
남은 것: 카르발라(현재 이라크)는 시아파 최대 성지 중 하나가 됐고, 후세인의 순교는 불의한 권력에 맞선 저항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기억된다. 이 사건은 순니-시아 분열을 감정적으로도 굳히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