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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새 종교가 100년 만에 이베리아부터 인더스까지를 하나의 정치권으로 묶었다. 사산조는 사라지고 동로마는 영토의 절반을 잃었다.
신라가 당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을 통일했고 북쪽에는 발해가 섰다. 신라 말 호족이 일어나며 후삼국으로 갈라진다.
해당 없음
후궁에서 시작해 황후가 되고 끝내 스스로 황제가 됐다. 나라 이름까지 주(周)로 바꿨다.
당의 강제 이주지에서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빠져나갔다. 천문령에서 추격군을 꺾고 동모산에 나라를 세웠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이자 4대 칼리파 알리의 아들. 우마이야 칼리파 야지드 1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다 카르발라에서 소수의 지지자와 함께 전멸했다.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약속을 어긴 당을 다시 몰아냈다. 죽어서 용이 되어 바다를 지키겠다며 동해에 묻혔다.
당나라에 유학해 화엄 사상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에 화엄종을 열었다.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을 세우며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당으로 가던 길에 해골물을 마시고 돌아섰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깨달음이다. 이후 시장과 마을을 돌며 글 모르는 사람에게 불교를 전했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인물 · 690 · 중국 유일의 여황제
후궁에서 시작해 황후가 되고 끝내 스스로 황제가 됐다. 나라 이름까지 주(周)로 바꿨다.
【그때 그 자리】
7세기 당은 개방적인 나라였다. 외국인이 관리가 되고 여러 종교가 공존했다. 북방 유목 문화의 영향으로 여성의 활동도 후대 중국보다 자유로웠다. 말을 타고 격구를 하는 여성 그림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정치는 문벌이 쥐고 있었다. 관롱 집단이라 불리는 서북 귀족들이 대대로 고위직을 나눠 가졌다. 과거제가 있었지만 뽑는 수가 적었다.
【왜 그렇게 됐나】
무조는 열네 살에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태종이 죽자 관례대로 절에 보내져 비구니가 됐다. 여기서 끝났어야 했다.
그런데 다음 황제 고종이 그를 다시 궁으로 불렀다. 그는 황후가 됐고, 고종이 병으로 눈이 나빠지자 대신 정무를 봤다. 두 사람을 두 성인이라 불렀다.
683년 고종이 죽고 아들 둘을 차례로 세웠다가 폐했다. 690년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주로 바꿨다. 중국 역사에서 여성이 황제가 된 유일한 예다.
【어떻게 흘렀나】
정통성이 없었으므로 그는 다른 데서 힘을 찾았다. 문벌 대신 과거 출신을 대거 등용했다. 과거 합격자 수를 크게 늘리고, 황제가 직접 시험하는 전시를 처음 시행했으며, 무과도 만들었다. 밀고를 장려하는 상자를 두고 반대 세력을 쳤다. 혹리를 써서 귀족을 숙청했다.
이 과정은 잔혹했다. 종실 이씨 수백 명이 죽었다. 자기 자식과 손자까지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시에 통치 자체는 안정적이었다. 농업이 장려돼 인구가 늘었고, 균전제가 유지됐다. 그가 뽑은 적인걸과 요숭 같은 인재가 뒷날 현종의 개원의 치를 이끈다. 태종의 정관의 치와 현종의 개원의 치 사이를 그가 이었다.
불교를 크게 밀었다. 미륵이 여자의 몸으로 세상에 온다는 경전 해석을 퍼뜨려 자기 즉위를 뒷받침했다. 뤄양 룽먼석굴의 거대한 노사나불이 그의 얼굴을 본떴다고 전한다.
705년 여든한 살에 병으로 누웠을 때 신하들이 정변을 일으켜 아들 중종을 복위시켰다. 그해 죽었다.
【그래서】
그의 무덤 앞에는 글자 없는 비석이 서 있다. 자기 평가는 후세에 맡긴다는 뜻이라는 해석이 널리 퍼져 있다.
【남은 것】
후대 유교 사관은 그를 극단적으로 나쁘게 그렸다. 여자가 황제가 됐다는 사실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치통감과 신당서의 서술에 이 시각이 짙게 배어 있다.
20세기 이후 재평가가 이뤄졌다. 문벌을 무너뜨리고 과거제를 실질화한 것이 이후 1천 년 중국 관료제의 방향을 정했다는 것이다.
같은 일을 한 남성 군주에게는 결단력이라 부르고 그에게는 잔혹함이라 부른 것 아니냐는 물음이 함께 따라다닌다. 기록을 누가 썼는가를 늘 함께 봐야 한다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