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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새 종교가 100년 만에 이베리아부터 인더스까지를 하나의 정치권으로 묶었다. 사산조는 사라지고 동로마는 영토의 절반을 잃었다.
고구려가 낙랑을 몰아내고 남하했다. 광개토대왕·장수왕 대에 최전성기를 맞았고 백제와 신라가 동맹으로 맞섰다.
왜신라가 백제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당과 손잡았다. 당은 고구려를 뒤에서 치려는 목적이 있었다.
결과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먼저, 8년 뒤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신라군을 이끌어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황산벌에서 5천으로 신라 5만을 맞았다. 네 번 이기고 다섯 번째에 무너졌다. 떠나기 전 자기 가족을 죽였다고 전한다.
딸이 죽은 대야성 함락 뒤 고구려와 일본을 거쳐 당으로 갔다. 진골로서 처음 왕이 됐다.
당으로 가던 길에 해골물을 마시고 돌아섰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깨달음이다. 이후 시장과 마을을 돌며 글 모르는 사람에게 불교를 전했다.
국법을 어기고 서역으로 나가 17년 만에 경전 657부를 싣고 돌아왔다. 그의 여행기는 인도 역사의 1급 사료다.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약속을 어긴 당을 다시 몰아냈다. 죽어서 용이 되어 바다를 지키겠다며 동해에 묻혔다.
당나라에 유학해 화엄 사상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에 화엄종을 열었다.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을 세우며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이자 4대 칼리파 알리의 아들. 우마이야 칼리파 야지드 1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다 카르발라에서 소수의 지지자와 함께 전멸했다.
10년 만에 시리아·이집트·페르시아를 정복했다. 정복지의 세금·군대·달력 제도를 세워 아랍 부족 연합을 제국으로 바꿨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인물 · 660 · 신라 장군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신라군을 이끌어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그때 그 자리】
김유신은 신라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신라의 원래 지배층이 아니었다. 그의 증조부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이다. 532년 나라를 들어 신라에 항복한 집안이다.
신라는 골품제 사회였다. 진골 아래 6두품부터는 아무리 공을 세워도 오를 수 있는 자리에 천장이 있었다. 가야계는 진골 대우를 받았지만 원래 왕경 귀족들 사이에서는 밖에서 온 집안이었다.
7세기 초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몰렸다. 백제 의자왕이 40여 성을 빼앗았고 642년 대야성이 무너졌다.
【왜 그렇게 됐나】
이 상황이 김유신에게는 기회였다. 나라가 위태로우면 출신보다 능력이 먼저 필요해진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움직였다. 여동생 문희를 김춘추와 혼인시켰다. 삼국유사에는 언니 보희가 꿈을 판 이야기와, 김유신이 혼인 전에 임신한 동생을 불태우려는 시늉을 해 선덕여왕 앞에서 김춘추가 나서게 만든 일화가 전한다. 사실 여부와 별개로, 가야계 무장 집안과 왕족이 결합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647년 상대등 비담이 여왕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켰다. 별이 떨어져 군심이 흔들리자 김유신은 연에 불을 매달아 띄워 별이 다시 올라갔다고 했다. 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김춘추와 김유신이 실권을 잡았다.
【어떻게 흘렀나】
654년 김춘추가 무열왕이 됐다. 진골이 왕이 된 첫 예다.
660년 김유신이 5만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과 맞섰다. 네 번을 졌다. 화랑 관창을 보내 죽게 하고 그 시신을 보여 군사들의 분노를 끌어올린 뒤에야 넘었다. 미담으로 전해지지만, 어린 소년을 두 번 사지로 보낸 결정이었다.
668년 고구려 원정에는 나이 때문에 직접 나가지 못하고 후방을 맡았다. 이후 당과의 전쟁에서도 전략을 세웠다. 673년 일흔아홉에 죽었다.
【그래서】
흥덕왕 때 흥무대왕으로 추존됐다. 신하로서 왕의 칭호를 받은 유일한 예다.
【남은 것】
평가는 갈린다. 삼국사기는 그를 최고의 인물로 그린다. 김부식 자신이 신라 왕족의 후손이라는 점을 감안해 읽어야 한다. 반대로 조선 후기부터는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겨레를 쳤다는 비판이 있었다.
다만 7세기의 사람에게 겨레라는 감각을 요구하는 것이 온당한가라는 반론도 있다. 당시 삼국은 서로를 남으로 여기는 별개의 나라였다.
확실한 것은 하나다. 밖에서 온 집안 출신이 신라의 최고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것은, 골품제라는 닫힌 제도 안에서도 전쟁이라는 비상 상태가 예외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예외가 끝나자 신라는 다시 닫혔다. 200년 뒤 최치원이 6두품의 벽에 부딪혀 산으로 들어가는 것이 같은 제도의 다른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