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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종교가 아니라 주권을 국제 질서의 단위로 삼았다. 절대왕정이 상비군과 관료제로 국가를 다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달아 겪었다. 국토가 황폐해지고 명청 교체 속에서 북벌론과 실학이 함께 나왔다.
해당 없음
형제들을 제거하고 아버지 샤 자한을 유폐시킨 뒤 제위에 올랐다. 남인도까지 정복해 무굴 제국을 최대 영토로 넓혔으나, 이슬람 정통주의 정책으로 힌두교도와의 갈등을 키워 제국 쇠퇴의 씨앗도 함께 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재상 없이 직접 통치하며 72년간 프랑스를 다스렸다. 베르사유 궁전을 지어 귀족을 곁에 묶어두고 왕권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근대 화학의 문을 열다
도박에서 확률론을 끌어내다
시골 젠트리 출신으로 내전에서 철기병을 길러 왕당파를 꺾었다. 왕을 처형했지만 스스로 왕에 가까운 권력을 쥐었다.
확실한 것을 찾으려 모든 것을 의심했고, 의심하는 자신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데서 멈췄다.
직접 만든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과 금성의 위상을 봤다.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증거였고, 그 대가로 여생을 가택 연금으로 보냈다.
오스만이 빈을 두 달째 포위했을 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이 날개 단 기병을 이끌고 언덕에서 내려왔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 돌격으로 꼽힌다.
아내 뭄타즈 마할이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 죽자 무덤을 짓기 시작했다. 22년이 걸렸다. 말년에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갇혀 그 무덤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죽었다.
뉴턴과 별개로 미적분을 완성하다
바스쿠 다 가마 이후 400년.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 닿는 길이 열리며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밀려났다.
유럽의 공산품 → 아프리카의 노예 → 아메리카의 설탕·면화 → 유럽. 세 대륙이 하나의 경제로 묶였다.
인물 · 1658 · 제국을 가장 넓혔지만 가장 위태롭게 만든 황제
형제들을 제거하고 아버지 샤 자한을 유폐시킨 뒤 제위에 올랐다. 남인도까지 정복해 무굴 제국을 최대 영토로 넓혔으나, 이슬람 정통주의 정책으로 힌두교도와의 갈등을 키워 제국 쇠퇴의 씨앗도 함께 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때 그 자리: 1658년 아우랑제브는 병든 아버지 샤 자한(타지마할을 지은 황제)을 유폐시키고, 왕위 계승을 다투던 형제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무굴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왜 그렇게 됐나: 무굴 황실은 장자 상속 원칙이 확립돼 있지 않아 형제 간의 왕위 다툼이 관례처럼 반복됐다. 아우랑제브는 이 다툼에서 가장 치밀하고 냉혹하게 움직여 승리했다.
어떻게 흘렀나: 그는 남인도의 데칸고원까지 정복 전쟁을 확대해 무굴 제국을 역사상 최대 영토로 넓혔다. 동시에 독실한 이슬람 정통주의자로서 비이슬람교도에게 부과하던 인두세(지즈야)를 아버지 대에 폐지됐던 것을 다시 부활시키고, 힌두 사원을 파괴하는 등 종교적으로 강경한 정책을 폈다.
그래서: 이 정책은 힌두교도가 다수인 제국 신민들의 반발을 샀고, 마라타 동맹을 비롯한 지방 세력의 저항이 그의 말년 내내 이어졌다. 끝없는 데칸 원정으로 국고도 크게 소모됐다.
남은 것: 아우랑제브가 죽은 뒤 무굴 제국은 급속히 분열됐다 — 그가 넓힌 영토를 지킬 만한 구심력을 정작 그 자신의 통치가 갉아먹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100여 년 만에 무굴 제국은 사실상 이름만 남은 상태로 영국의 지배를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