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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라틴 유럽·비잔틴·이슬람이 지중해를 나눠 가졌다. 카롤루스의 제국은 곧 쪼개졌고 바이킹과 마자르가 유럽을 휘저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당이 무너지고 송이 섰다.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왜인구 압력과 흘수 얕은 롱십이 결합했다. 강을 거슬러 내륙까지 들이닥칠 수 있는 배가 결정적이었다.
결과약탈로 시작해 정착과 건국으로 끝났다. 노르망디·러시아·아이슬란드가 이들의 손에서 생겼고, 북아메리카에도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닿았다.
폴리네시아인들은 나침반 없이 별과 물결과 새를 읽어 태평양을 건넜다. 마오리 전승에서 아오테아로아를 처음 찾은 이가 쿠페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잇는다는 뜻으로 국호를 정했다. 호족을 혼인으로 묶었다.
왕건의 아들로, 공신과 호족이 왕을 좌우하던 판을 뒤집었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가 그 도구였다.
마자르의 약탈을 끝내고 황제 대관을 받았다. 주교를 제후로 삼아 세속 귀족을 견제한 방식이 이후 제국의 특징이 된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나라의 멸망 · 936 · 아버지가 아들에게 갇혔다가 아들을 치러 왔다
견훤이 넷째에게 왕위를 주려 하자 맏아들 신검이 아버지를 금산사에 가뒀다. 탈출한 견훤은 왕건에게 투항했고, 일리천 전투에서 자기가 세운 나라를 치는 편에 섰다. 후삼국이 여기서 끝났다.
【그때 그 자리】
9세기 말 신라는 조세가 걷히지 않고 지방 통제가 무너졌다. 889년 원종과 애노의 난 이후 각지에서 봉기가 이어졌다.
옛 백제 땅은 특히 불만이 컸다. 660년 멸망 이후 240년간 신라 지배 아래 있었는데, 이 지역 출신은 관직 등용에서 차별받았다. 백제 유민의 후손이라는 의식이 남아 있었다.
【왜 그렇게 됐나】
견훤은 상주 가은현의 농민 집안에서 났다. 아버지 아자개는 뒤에 스스로 장군을 칭한다.
그는 신라 군인이 되어 서남해 방면을 지켰다. 변방에서 실전 부대를 거느린 것이다.
892년 무진주를 점령하고 900년 완산주, 지금의 전주에서 나라를 세웠다. 국호를 백제라 했다.
그가 내건 명분이 분명하다. 의자왕의 오랜 원한을 갚겠다는 것이었다. 240년 전에 망한 나라의 이름을 다시 꺼낸 것은, 그 지역 사람들의 기억을 불러낸 것이다. 궁예가 고구려를 꺼낸 것과 같은 방식이다.
【어떻게 흘렀나】
후백제는 세 나라 가운데 가장 강했다. 곡창 지대를 쥐었고 서해로 나가 중국 오월과 후당에 사신을 보냈다. 일본과도 통했다.
927년이 절정이었다. 견훤이 경주로 쳐들어가 포석정에 있던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웠다. 구원하러 온 왕건을 공산에서 크게 이겼다. 이때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바꿔 입고 대신 죽었다.
그런데 이 승리가 오히려 그를 몰았다. 신라 사람들에게 그는 왕을 죽인 자가 됐다. 명분이 왕건에게 넘어갔다.
930년 고창 전투에서 크게 졌다. 이후 기세가 꺾였다.
결정타는 안에서 나왔다. 935년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주려 하자, 맏아들 신검이 아버지를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죽였다.
견훤이 석 달 만에 탈출해 왕건에게 갔다. 자기가 세운 나라를 자기 손으로 치러 온 것이다.
936년 일리천에서 왕건은 견훤을 앞세우고 신검의 군대와 맞섰다. 후백제 군사들이 옛 왕을 보고 무기를 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신검이 항복했다.
견훤은 며칠 뒤 등창으로 죽었다.
【그래서】
36년이었다. 후삼국이 고려로 하나가 됐다.
【남은 것】
이 나라의 기록이 거의 남지 않았다. 승자가 정리한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견훤은 잔인하고 아버지를 배신한 인물로 그려진다. 태어날 때 호랑이가 젖을 먹였다거나 지렁이의 자식이라는 설화까지 붙었다. 진 쪽에 붙는 이야기들이다.
최근에는 다르게 보려는 흐름이 있다. 그는 지방 사회의 요구를 읽고 나라를 세웠으며, 대외 교섭에 능했고 행정 체계를 갖췄다. 왕건보다 먼저, 더 강하게 시작했다.
차이는 마지막에 났다. 왕건은 자기 자식들의 다툼을 죽은 뒤에 겪었고 견훤은 살아서 겪었다.
전주에 후백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왕궁터로 추정되는 자리가 발굴 중이고, 견훤이 쌓았다는 남고산성이 있다. 지역 차별의 오랜 뿌리를 이야기할 때 이 나라의 이름이 함께 나오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