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르 카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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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세 개의 세계

라틴 유럽·비잔틴·이슬람이 지중해를 나눠 가졌다. 카롤루스의 제국은 곧 쪼개졌고 바이킹과 마자르가 유럽을 휘저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당이 무너지고 송이 섰다.

한반도

고려 전기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전쟁 1건

바이킹 시대793 – 1066
노르드인 vs 유럽 각지

인구 압력과 흘수 얕은 롱십이 결합했다. 강을 거슬러 내륙까지 들이닥칠 수 있는 배가 결정적이었다.

린디스판 약탈 793파리 포위 885스탬퍼드 브리지 1066

결과약탈로 시작해 정착과 건국으로 끝났다. 노르망디·러시아·아이슬란드가 이들의 손에서 생겼고, 북아메리카에도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닿았다.

273년 · 유럽 지도를 다시 그렸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4명

오토 1세정치962 · 신성로마제국을 시작한 사람
AD 912 – AD 973

마자르의 약탈을 끝내고 황제 대관을 받았다. 주교를 제후로 삼아 세속 귀족을 견제한 방식이 이후 제국의 특징이 된다.

  • 레히펠트 전투 955 — 마자르 격퇴
  • 962년 황제 대관 — 제국의 시작
  • 제국 교회 정책 — 주교를 통치에 씀
광종정치958 · 호족의 힘을 꺾은 왕
AD 925 – AD 975

왕건의 아들로, 공신과 호족이 왕을 좌우하던 판을 뒤집었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가 그 도구였다.

  • 노비안검법 — 호족의 사병 기반을 해체
  • 과거제 도입 958 — 시험으로 관리를 뽑음
  • 공복 제정과 대대적 숙청
블라디미르 1세정치988 · 루스를 정교회로 이끈 대공
958 무렵 – 1015

여러 종교를 알아본 끝에 비잔티움의 정교회를 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선택으로 러시아가 서유럽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 쪽 문화권에 들어갔다.

  • 988년 키예프 루스 세례
  • 키릴 문자와 정교회가 함께 들어옴
  • 이 선택이 천 년의 방향을 정했다
쿠페탐험950 · 긴 흰 구름의 땅을 찾은 사람
10세기 무렵 전승

폴리네시아인들은 나침반 없이 별과 물결과 새를 읽어 태평양을 건넜다. 마오리 전승에서 아오테아로아를 처음 찾은 이가 쿠페다.

  • 별과 물결로 항해
  • 아오테아로아 — 긴 흰 구름의 땅
  • 폴리네시아 항해는 유럽보다 수백 년 앞섰다

그 무렵의 사건

958
광종의 왕권 강화
고려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시행해 호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크게 강화했다.
건국 초기 고려는 지방 호족들의 사병과 경제력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강했다. 광종은 호족들이 불법으로 차지한 노비를 원래 신분으로 되돌리는 노비안검법을 시행해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이어 중국의 후주 출신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처음 도입해, 가문이 아닌 시험 성적으로 관리를 뽑는 길을 열었다. 이런 개혁을 반발하는 공신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며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렸다.
993
서희의 외교담판과 강동 6주
거란의 대군이 침입하자 서희는 담판을 벌여 전쟁 없이 물러가게 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강동 6주를 얻어냈다.
거란(요)의 장수 소손녕은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해 왔다.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으므로 압록강 일대도 고려 땅이 되어야 마땅하며, 거란과 국교를 맺으려면 그 사이를 가로막은 여진족 땅을 고려가 정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설득했다. 소손녕은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물렸고, 고려는 그 대가로 압록강 동쪽 강동 6주 지역을 확보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 말로 전쟁을 막고 오히려 영토까지 얻어낸 외교사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
1000
가나 제국의 번성
금과 소금을 맞바꾸며 사하라 이남 첫 대제국을 세웠다.
사하라 종단 대상들이 금과 소금을 실어 날랐다. 11세기 지리학자 알바크리는 「왕이 금덩이를 매어 둔 말을 탄다」고 적었다. 나라 이름은 실은 왕의 칭호였고, 백성은 이 땅을 와가두라 불렀다. 11세기 이후 알모라비드의 정복으로 무너졌다는 설명이 오래 정설이었지만, 최근 연구는 그 정복의 고고학 증거가 약하다고 지적한다 — 교역로가 옮겨가고 가뭄이 겹친 서서히 쇠퇴였을 가능성이 크다.
936
왕건의 후삼국 통일
왕건은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뒤를 이은 세력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후삼국을 통일해 고려를 세웠다.
왕건은 궁예의 신하로 있다가 궁예가 폭정을 일삼자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고려를 세웠다(918년).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유폐당한 뒤 고려에 투항해오자, 왕건은 이를 명분 삼아 신검의 후백제를 정벌해 936년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그는 지방 호족을 결혼 정책과 관직 하사로 포섭하고, 「훈요 10조」를 남겨 후대 왕들에게 통치 원칙을 전했다.
1019
강감찬과 귀주대첩
거란의 3차 침입 때, 강감찬은 귀주에서 거란 대군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크게 무찔렀다.
거란은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며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다. 세 번째 침입 때 거란 장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개경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에 보급이 끊기고 지쳐 퇴각하게 됐다. 강감찬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찔러, 살아 돌아간 병력이 수천에 불과할 정도로 궤멸시켰다(1019년). 이 승리로 거란은 이후 다시는 대규모로 고려를 침공하지 못했다.
918
고려 건국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잇는다는 뜻으로 국호를 정했다.
후삼국의 분열이 끝나고 과거제와 관료제가 자리 잡는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하자르 카간국

나라의 멸망 · 969 · 유대교를 고른 유목 국가

볼가 하구에서 동서 교역을 중계하고 지배층이 유대교로 개종한 특이한 나라.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슬라프가 사르켈과 아틸을 파괴하며 무너졌고, 초원의 완충 지대가 사라지자 페체네그·쿠만이 밀려들었다.

【그때 그 자리】 7~10세기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볼가강 하류다.

튀르크계 유목 세력이 세웠다.

위치가 요점이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강길과 동서를 잇는 초원길이 만난다.

【왜 그렇게 됐나】 남쪽에 이슬람 칼리파국, 서쪽에 비잔티움, 북쪽에 슬라브와 바랑기아가 있었다.

하자르가 그 사이에 있었다.

8세기에 아랍과 여러 차례 싸웠다. 캅카스를 넘어오는 것을 막았다.

그것이 동유럽으로 이슬람이 확산되는 것을 저지했다는 평가가 있다.

비잔티움과는 대체로 동맹이었다. 황제가 하자르 공주와 혼인한 일도 있다.

그런데 어느 쪽에도 완전히 기울 수 없었다.

이슬람을 받아들이면 칼리파의 신하가 되고, 기독교를 받아들이면 비잔티움 황제 아래가 된다.

【어떻게 흘렀나】 8~9세기에 지배층이 유대교를 받아들였다.

유목 국가가 유대교를 국교로 삼은 유일한 사례다.

왜 그랬는가.

제3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유력하다. 어느 대국의 종교도 아니면서 경전을 가진 종교다.

그리고 유대 상인들이 교역망을 쥐고 있었다.

「하자르 왕과 랍비의 논쟁」이라는 전승이 있다. 세 종교의 대표를 불러 토론시켰다는 것이다.

12세기 유다 할레비가 「쿠자리」라는 책에서 그 이야기를 다뤘다.

10세기에 코르도바의 유대인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가 하자르 왕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 민족의 왕국이 있다는 말을 듣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요셉 왕의 답장이 남아 있다. 진위 논쟁이 있으나 대체로 진본으로 본다.

【그래서】 965년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슬라프가 쳤다.

수도 아틸을 함락했다.

그 뒤 기록에서 빠르게 사라진다.

왜 회복하지 못했는가.

교역로가 바뀐 것이 크다. 아랍 은화의 유입이 줄었다.

그리고 페체네그 같은 다른 유목 세력이 초원을 차지했다.

【남은 것】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하자르의 후손인가」가 오래된 논쟁이다.

20세기에 아서 쾨슬러가 「제13지파」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유전자 연구는 대체로 부정한다.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유전 구성은 중동과 남유럽 계통이 주를 이룬다.

하자르의 유대교 수용이 지배층에 한정됐다는 것도 지적된다.

수도 아틸의 위치조차 확정되지 않았다. 볼가강 삼각주 어딘가로 본다.

300년을 간 나라인데 남긴 문서가 거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대부분 이웃이 쓴 것이다.

지도에서 보기: 9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악숨 왕국 후백제 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