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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그리스 각지에 도시국가가 섰다. 왕정이 귀족정으로, 다시 참주정과 민주정으로 갈라졌다. 인구가 늘어 흑해와 시칠리아까지 식민시를 세웠다. 같은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로마가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운다.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왜주 왕실이 힘을 잃자 제후들이 「왕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서로를 쳤다. 실제로는 패자 자리를 다툰 것이다.
결과170여 나라가 십여 개로 줄었다. 전쟁이 잦아지자 병법과 외교술이 발달했고, 그 혼란 속에서 공자와 제자백가가 나왔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다. 2,500년 전 열세 편의 병법이 오늘날 경영과 스포츠에서도 읽힌다.
춘추의 혼란 속에서 신분이 아니라 배움으로 사람을 평가하자고 가르쳤다. 살아서는 쓰이지 못하고 14년을 떠돌았다.
정복보다 관리로 더 큰 일을 했다. 20개 사트라피로 나누고 감찰관을 돌려 총독을 감시했다.
무위자연 — 억지로 하지 않아야 오히려 잘 된다는 역설을 5천 자에 담았다. 유교와 함께 중국 사상의 두 기둥이 됐다.
부처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브라만의 권위를 부정했다. 어떤 생명도 해치지 말라는 불살생을 끝까지 밀고 갔다.
석가족 왕자로 나 스물아홉에 집을 나섰다. 극단적인 고행도 답이 아니라고 보고 가운데 길을 택했다. 그가 말한 것은 신이 아니라 원인이었다.
숫자가 만물의 근원이라 믿은 사람
해당 없음
사건 · BC 508 ·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시민이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추첨과 투표로 공직을 채우는 실험이 시작됐다. 2,500년 뒤 세계의 표준이 된다.
【그때 그 자리】
기원전 7세기 아테네는 귀족이 다스렸다. 빚을 갚지 못한 농민이 노예가 되는 일이 흔했다. 자기 몸을 담보로 빌렸기 때문이다. 사회가 폭발 직전이었다.
기원전 594년 솔론이 개혁했다. 빚을 없애고 몸을 담보로 잡는 것을 금했으며, 재산에 따라 시민을 넷으로 나눠 참정권을 줬다. 혈통 대신 재산이 기준이 된 것이다. 완전하지 않았지만 문이 열렸다.
이후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들어섰다가 쫓겨났다.
【왜 그렇게 됐나】
기원전 508년 클레이스테네스가 결정적인 손질을 했다. 그는 부족의 편성을 바꿨다.
그전까지 아테네인은 혈연 부족에 속해 있었고, 그것이 곧 귀족의 세력 기반이었다. 그는 아티카 전역을 해안과 내륙과 도시로 나누고, 각 지역에서 한 조각씩 뽑아 열 개의 새 부족을 만들었다. 서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한 부족이 됐다. 혈연 대신 사는 곳이 기준이 되면서 귀족의 기반이 흩어졌다.
평의회 500인은 이 열 부족에서 50명씩 제비뽑기로 뽑았다. 선거가 아니라 추첨이다. 선거는 말 잘하고 돈 있는 사람이 유리하지만 추첨은 그렇지 않다. 아테네인은 추첨이야말로 민주적이라고 여겼다.
【어떻게 흘렀나】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 이후 크게 확대됐다. 함대의 노를 저은 것이 갑옷 살 돈이 없는 하층 시민이었고, 이들이 나라를 구했으니 발언권을 요구했다.
페리클레스 시대에 완성됐다. 민회는 시민 누구나 참석해 발언하고 투표했다. 정족수가 6천이었다. 공직에 수당을 지급해 가난한 사람도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재판도 시민 배심원 수백 명이 맡았다.
도편추방제도 있었다. 참주가 될 위험이 있는 인물의 이름을 도자기 조각에 적어, 6천 표 이상 나오면 10년간 추방했다. 실제 도편이 여럿 발굴됐다.
【그래서】
한계가 컸다. 시민은 성인 남성 자유민뿐이었다. 여성과 노예와 외국인 거류민은 제외됐다. 인구 25만 중 시민은 3만에서 4만이었다. 노예 노동이 있었기에 시민이 하루 종일 정치에 쓸 시간이 있었다는 지적이 따라다닌다.
그리고 스스로 무너졌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민회는 시칠리아 원정을 결정해 함대를 잃었고,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했다. 아테네를 무너뜨린 결정들이 모두 시민 투표로 나왔다.
【남은 것】
이후 2천 년 동안 민주정은 좋은 말이 아니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비판했고, 근대까지도 중우정치의 다른 이름으로 쓰였다. 18세기 미국 건국자들도 민주정이 아니라 공화정을 만든다고 했다.
민주주의가 긍정적인 말이 된 것은 19세기 이후다.
오늘의 민주주의는 아테네와 많이 다르다. 우리는 대표를 뽑고 그들이 결정한다. 아테네는 시민이 직접 정하고 공직은 추첨으로 채웠다. 어느 쪽이 더 민주적인가라는 물음이, 추첨으로 시민 회의를 구성하는 오늘의 여러 실험 뒤에 있다.
지도에서 보기: BC 7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로마 공화정 수립 반투의 확산 북미의 흙무덤 마라톤 전투 석가의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