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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국가 단위로 갈라져 싸웠다. 신앙이 곧 국제 정치였고 30년전쟁이 그 정점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달아 겪었다. 국토가 황폐해지고 명청 교체 속에서 북벌론과 실학이 함께 나왔다.
왜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중과세와 가톨릭 강요에 개신교(칼뱅파)가 강한 네덜란드 북부 주들이 반발했다.
결과80년에 걸친 전쟁 끝에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독립을 공식 인정했다. 흔히 '80년 전쟁'으로도 불린다.
왜보헤미아에서 개신교 귀족이 황제의 관리를 창밖으로 던졌다. 신성로마제국 내부의 종교 갈등에 주변 강대국이 세력 다툼으로 끼어들었다.
결과독일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주권국가 체제가 자리 잡는다.
왜찰스 1세가 의회 없이 세금을 걷고 국교회를 강요하자 의회가 군대 통제권을 요구했다. 왕이 노팅엄에서 깃발을 올렸다.
결과크롬웰의 신형군이 왕당파를 꺾었고 왕은 재판 끝에 참수됐다. 공화정과 호국경 독재를 거쳐 1660년 왕정이 돌아왔지만, 의회 없는 왕은 다시 없었다.
왜기근과 증세로 이자성의 농민군이 베이징을 함락했다. 산해관을 지키던 명 장수가 청군을 불러들였다.
결과청이 베이징에 들어가 중국 전역을 차지했다. 이후 260여 년을 다스린다.
시골 젠트리 출신으로 내전에서 철기병을 길러 왕당파를 꺾었다. 왕을 처형했지만 스스로 왕에 가까운 권력을 쥐었다.
확실한 것을 찾으려 모든 것을 의심했고, 의심하는 자신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데서 멈췄다.
도박에서 확률론을 끌어내다
직접 만든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과 금성의 위상을 봤다.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증거였고, 그 대가로 여생을 가택 연금으로 보냈다.
아내 뭄타즈 마할이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 죽자 무덤을 짓기 시작했다. 22년이 걸렸다. 말년에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갇혀 그 무덤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죽었다.
기동성 있는 보병과 경포병으로 근대 전술을 열었다. 브라이텐펠트에서 이기고 뤼첸에서 이기며 죽었다.
형제들을 제거하고 아버지 샤 자한을 유폐시킨 뒤 제위에 올랐다. 남인도까지 정복해 무굴 제국을 최대 영토로 넓혔으나, 이슬람 정통주의 정책으로 힌두교도와의 갈등을 키워 제국 쇠퇴의 씨앗도 함께 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위그노의 요새를 부수고 귀족의 성을 헐었으며, 가톨릭 추기경이면서 개신교 스웨덴에 돈을 대 합스부르크를 견제했다.
심장이 뿜는 피의 양을 계산해 혈액이 몸을 순환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재상 없이 직접 통치하며 72년간 프랑스를 다스렸다. 베르사유 궁전을 지어 귀족을 곁에 묶어두고 왕권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근대 화학의 문을 열다
바스쿠 다 가마 이후 400년.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 닿는 길이 열리며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밀려났다.
유럽의 공산품 → 아프리카의 노예 → 아메리카의 설탕·면화 → 유럽. 세 대륙이 하나의 경제로 묶였다.
전쟁 · 1644 · 청·오삼계 vs 이자성·명 잔존 세력
기근과 증세로 이자성의 농민군이 베이징을 함락했다. 산해관을 지키던 명 장수가 청군을 불러들였다. 청이 베이징에 들어가 중국 전역을 차지했다. 이후 260여 년을 다스린다.
【그때 그 자리】
17세기 초 명은 안팎으로 눌려 있었다.
1592년부터 조선에 원병을 보내 7년을 싸우느라 재정이 바닥났다. 만력제는 30년 가까이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환관 위충현이 실권을 쥐고 반대파를 학살했다.
세금은 무거웠다. 은으로 내게 했는데, 아메리카와 일본에서 들어오던 은의 유입이 17세기 중반에 줄면서 은값이 올랐다. 같은 세금을 내려면 더 많은 곡물을 팔아야 했다.
기후도 나빴다. 소빙기의 한가운데였다. 화북에 가뭄이 이어지고 기근이 들었다. 역병도 돌았다.
밖에서는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합해 1616년 후금을 세우고 1619년 사르후에서 명군 10만을 이겼다.
【왜 그렇게 됐나】
명은 두 방향을 동시에 감당할 수 없었다.
북쪽 방어에 돈을 쓰려면 안에서 걷어야 하고, 걷으면 반란이 났다. 반란을 진압하려 군대를 돌리면 북쪽이 열렸다.
1644년 4월 이자성의 반란군이 베이징에 들어왔다. 이자성은 역참 폐지로 일자리를 잃은 역졸 출신이다. 국가가 비용을 줄이려 없앤 자리에서 나온 사람이 그 국가를 무너뜨렸다.
숭정제가 경산에서 목을 맸다. 276년이었다.
【어떻게 흘렀나】
산해관을 지키던 명의 장수 오삼계에게 선택이 남았다.
이자성에게 항복할 수도, 청과 손잡을 수도 있었다. 그는 청을 택했다. 반란군을 치겠다는 명분이었다.
애첩 진원원을 이자성 쪽에 빼앗겨서라는 이야기가 널리 전하지만, 실제로는 가문과 세력의 존속을 건 계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청군이 산해관을 넘었다. 그리고 나가지 않았다.
1644년 6월 청이 베이징에 들어와 수도로 삼았다. 인구 100만이 안 되던 만주족이 1억 5천만의 중국을 다스리게 됐다.
저항은 남쪽에서 이어졌다. 남명 정권이 여러 차례 섰다가 무너졌다. 정성공이 타이완을 근거로 버티다 1683년 끝났다.
청이 강요한 것이 변발이다. 머리를 남기려면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명령이었다. 거부한 지역에서 학살이 있었다. 가정과 양주에서 대규모 살육이 벌어졌다.
【그래서】
청은 한족 관리를 그대로 썼다. 각 부서에 만주인과 한인을 한 명씩 두는 만한병용제를 폈다. 과거제를 유지하고 유교를 존중했다.
겉을 바꾸지 않고 위를 갈아 끼운 것이다. 이 방식으로 268년을 갔다.
【남은 것】
조선에게 이 교체는 세계관의 문제였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이미 청에 굴복했지만, 명이 실제로 망하자 충격이 더 컸다. 중화가 오랑캐에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조선은 청을 섬기면서 속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이중 상태로 오래 지냈다. 명이 망했으니 이제 중화는 조선에 있다는 소중화 의식이 여기서 굳었다. 명의 마지막 연호 숭정을 개인 문서에 계속 쓴 사대부가 있었다.
18세기에 와서야 박지원과 박제가 같은 이들이 청에 가서 보고 배울 것이 있다고 썼다. 열하일기가 그 기록이다. 오랑캐라 부르던 나라가 실제로는 더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본 사람들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