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투어 · 아무 곳이나 누르면 멈춤
지도에 표시
지도는 휠·더블클릭·드래그 · PgUp/PgDn은 스냅샷 이동
게이지를 Shift+드래그하면 10배 정밀 · 오른쪽 눈금은 인물·전쟁·사건이 있는 자리
틀린 데나 빠진 데를 알려주시면 확인하고 고칩니다.
이 브라우저에만 저장됩니다. 서버로 아무것도 보내지 않습니다.
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공화정의 외피를 남긴 채 1인 지배를 세웠다. 200년간 지중해 전역에 큰 전쟁이 없었고 속주마다 도시와 도로와 수도교가 깔렸다.
신라·고구려·백제가 차례로 서고 가야가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았다. 아직 연맹왕국 단계로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
왜아르메니아 왕위를 두고 다투다 전면전이 됐다. 트라야누스는 인도로 가는 교역로까지 노렸다.
결과로마 최대 판도를 만들었으나 후방이 잇따라 봉기했다. 후임 하드리아누스가 곧바로 유프라테스까지 물러났다 — 확장의 한계를 인정한 것이다.
속주 히스파니아 출신의 첫 황제. 다키아의 금으로 로마를 다시 짓고 동방으로 진군했다.
확장을 멈추고 지키기로 한 황제. 브리타니아에 장벽을 세우고, 재위 절반을 속주를 돌며 보냈으며, 판테온을 다시 지었다.
쿠샨 제국의 전성기를 만들었다. 인도·중앙아시아·중국을 잇는 교역로를 쥐고 그 길로 불교를 북쪽에 퍼뜨렸다.
최초의 지진계를 만들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전쟁 · 114 · 제국이 가장 컸던 순간
아르메니아 왕위를 두고 다투다 전면전이 됐다. 트라야누스는 인도로 가는 교역로까지 노렸다. 로마 최대 판도를 만들었으나 후방이 잇따라 봉기했다. 후임 하드리아누스가 곧바로 유프라테스까지 물러났다 — 확장의 한계를 인정한 것이다.
【그때 그 자리】 AD 114년이다. 트라야누스는 이미 다키아(지금의 루마니아)를 정복해 금광을 얻었다.
동쪽에는 파르티아가 있었다. 로마와 200년 가까이 대치한 상대다.
BC 53년 크라수스가 카레에서 참패해 군기를 잃은 이래, 로마에게 파르티아는 갚지 못한 빚이었다.
【왜 그렇게 됐나】 명분은 아르메니아였다. 두 제국 사이의 완충 왕국인데, 파르티아 왕이 로마와 상의 없이 자기 조카를 왕으로 앉혔다.
실제 동기는 여럿으로 본다. 예순 넘은 황제의 마지막 원정이라는 점, 인도로 가는 교역로를 쥐려 했다는 점, 알렉산드로스를 의식했다는 점이 거론된다.
【어떻게 흘렀나】 아르메니아를 속주로 삼았다. 이어 메소포타미아로 내려갔다.
116년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했다. 로마 황제가 그곳에 들어간 첫 사례다.
더 내려가 페르시아만에 닿았다. 배를 보고 인도로 가는 상선이라는 말을 듣자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내가 젊었다면 인도까지 건너갔을 텐데.」
이때가 로마 제국의 최대 판도다. 500만 ㎢가 넘었다.
【그래서】 곧 무너졌다. 뒤쪽에서 반란이 터졌다.
메소포타미아 전역이 들고일어났고, 동시에 키레네·이집트·키프로스에서 유대인 봉기(키토스 전쟁)가 났다. 도시가 통째로 파괴됐고 양쪽에서 수십만이 죽었다.
트라야누스가 하트라를 포위하다 실패했다. 더위와 물 부족으로 물러났다.
117년 돌아오는 길에 병으로 죽었다.
【남은 것】 후계자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하자마자 메소포타미아를 전부 포기했다. 국경을 유프라테스로 되돌렸다.
정복보다 유지가 중요하다는 판단이었다. 그가 브리타니아에 장벽을 쌓은 것도 같은 생각이다.
로마 원로원이 새 황제를 맞을 때 「아우구스투스보다 운이 좋고 트라야누스보다 훌륭하기를」이라 외쳤다. 그가 좋은 황제의 기준이 된 것이다.
로마에 트라야누스 원주(圓柱)가 서 있다. 높이 30m에 다키아 전쟁이 나선으로 새겨져 있다 — 2,600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한다.
가장 넓었던 순간이 곧 물러서기 시작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