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푸아티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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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억 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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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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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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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조산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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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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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이슬람의 등장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새 종교가 100년 만에 이베리아부터 인더스까지를 하나의 정치권으로 묶었다. 사산조는 사라지고 동로마는 영토의 절반을 잃었다.

한반도

남북국시대

신라가 당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을 통일했고 북쪽에는 발해가 섰다. 신라 말 호족이 일어나며 후삼국으로 갈라진다.

전쟁 1건

투르-푸아티에 전투732
프랑크 왕국 vs 우마이야 칼리파국

이베리아를 장악한 우마이야 세력이 피레네를 넘어 갈리아 남부를 약탈했다.

투르-푸아티에 732

결과카롤루스 마르텔이 저지했다. 이슬람의 서유럽 진출이 여기서 멈춘다.

하루 · 이슬람 지휘관이 전사하며 북진이 멈췄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3명

카를 마르텔장군732 · 망치라 불린 사람
AD 688 – AD 741

궁재로서 왕보다 실권을 쥐었다. 투르에서 우마이야 기병을 보병 방진으로 막아냈다.

  • 투르-푸아티에 전투 732
  • 교회 재산으로 기병을 육성
  • 카롤루스 대제의 할아버지
이백예술750 · 술과 달의 시인
AD 701 – AD 762

관직에는 오래 붙어 있지 못하고 평생을 떠돌았다. 즉흥으로 지은 시 1,000여 편이 남았다.

  • 당시(唐詩)의 정점 — 「시선」이라 불림
  • 안사의 난에 휘말려 유배
  •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죽었다는 전설
압둘 라흐만 1세정치756 · 몰살을 피해 도망친 왕자
731 – 788

아바스가 우마이야 일족을 몰살할 때 혼자 살아 다섯 해를 도피해 이베리아에 닿았다. 거기서 코르도바에 나라를 세웠고 300년을 갔다.

  • 5년의 도피
  • 코르도바 후우마이야 건국
  • 코르도바 대모스크 착공

그 무렵의 사건

700
스리위자야의 번성
땅이 아니라 바닷길을 지배해 부를 쌓은 나라였다.
수마트라 팔렘방을 중심으로 말라카 해협을 장악해 인도와 중국을 잇는 배들에게 통행세를 물렸다. 7세기 중국 승려 의정은 이곳에 승려 1천 명이 공부하는 불교 학문 중심지가 있다고 기록했다. 농사보다 무역에 기댄 「바다의 나라」였던 셈이다. 1025년 인도 남부의 촐라 왕조가 함대를 보내 왕도를 약탈했다 — 남아시아 해군력이 동남아시아까지 미친 드문 사례다. 이후 항구에 토사가 쌓이고 다른 항구들이 크며 서서히 저물었다.
698
발해 건국
고구려 유민과 말갈이 만주에 세운 나라. 스스로 고구려를 잇는다고 밝혔다.
고구려 유민이 만주에 세운 나라. 스스로 고구려를 잇는다고 밝혔다.
682
신문왕의 왕권 강화
삼국통일 직후 즉위한 신라 신문왕은 반란을 진압해 진골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국학을 세워 왕권 중심의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
신문왕은 즉위 직후 장인이자 유력 진골 귀족이던 김흠돌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이에 연루된 귀족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귀족에게 지급하던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해 귀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켰으며,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국립 교육기관 국학을 세워 왕에게 충성하는 관료를 길러냈다. 지방을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해 넓어진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릴 기반도 마련했다.
676
신라의 삼국통일
당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을 확보했다. 한반도가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권이 됐다.
한반도가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권이 됐다. 다만 고구려 땅 대부분을 잃었다.
671
스리위자야
말라카 해협을 쥔 바다의 나라.
수마트라의 팔렘방을 중심으로 인도와 중국을 잇는 길목을 600년간 쥐었다. 당의 승려 의정이 이곳에 머물며 산스크리트를 배웠다. 성을 남기지 않아 오래 잊혔다가 20세기에 비문으로 확인됐다.
800
카롤루스의 대관
교황이 프랑크 왕에게 황제관을 씌웠다. 서유럽이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기 시작한다.
서유럽이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교황과 황제의 오랜 다툼도 여기서 싹튼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투르-푸아티에 전투

전쟁 · 732 · 프랑크 왕국 vs 우마이야 칼리파국

이베리아를 장악한 우마이야 세력이 피레네를 넘어 갈리아 남부를 약탈했다. 카롤루스 마르텔이 저지했다. 이슬람의 서유럽 진출이 여기서 멈춘다.

【그때 그 자리】

7세기와 8세기 초 이슬람 세력의 확장 속도가 놀라웠다.

632년 무함마드가 죽은 뒤 100년이 안 되어 대서양에서 인더스강까지 퍼졌다. 711년 타리크가 지브롤터를 건너 이베리아반도로 들어갔고, 서고트 왕국이 몇 해 만에 무너졌다.

720년 무렵에는 피레네를 넘어 갈리아 남부로 들어왔다. 나르본을 근거지로 삼고 북쪽으로 원정을 벌였다.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조였는데 왕들이 실권이 없어 게으른 왕이라 불렸다. 실권은 궁재가 쥐고 있었다. 카롤루스 마르텔이 그 자리에 있었다.

【왜 그렇게 됐나】

732년 아브드 알라흐만이 이끄는 군대가 보르도를 함락하고 북상했다. 목표는 투르의 성 마르티노 수도원으로 보인다. 갈리아 최대의 순례지이자 부유한 곳이었다.

아키텐 공작 외드가 패해 카롤루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원래 사이가 나빴던 상대다.

카롤루스는 이 원정을 예상하고 몇 해 전부터 상비 보병을 훈련시켜 왔다.

【어떻게 흘렀나】

732년 10월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에서 마주쳤다. 정확한 위치는 확정되지 않았다.

엿새간 서로 소규모 접촉만 하며 대치했다. 아랍군은 기병 중심이었고 전리품을 잔뜩 실은 상태였다.

카롤루스는 숲과 언덕을 등지고 밀집 방진을 짰다. 병사들이 방패를 맞대고 서서 기병 돌격을 받아냈다. 한 기록은 이들이 얼음 벽처럼 서 있었다고 적었다.

기병이 밀집 보병을 정면으로 뚫지 못했다.

전투 중에 프랑크 정찰대가 적의 진영을 습격했다는 소식이 돌자, 전리품을 지키려 아랍군 일부가 돌아섰다. 대열이 흐트러졌다. 아브드 알라흐만이 전사했다.

밤이 되자 아랍군은 진영을 그대로 두고 물러났다.

카롤루스는 이 승리로 망치라는 뜻의 마르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래서】

이슬람 세력은 이후에도 몇 차례 원정을 벌였으나 갈리아 깊숙이 들어오지 못했다. 759년 나르본을 잃고 피레네 남쪽으로 물러났다.

카롤루스의 아들 피핀이 751년 메로빙거를 폐하고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다. 교황의 승인을 얻어서다. 손자가 카롤루스 대제, 샤를마뉴다. 800년 그가 로마에서 황제의 관을 받는다.

【남은 것】

이 전투의 의미는 오래 부풀려졌다.

18세기 기번이 이 전투가 없었다면 옥스퍼드에서 코란을 가르치고 있었을 것이라고 썼다. 서양 문명을 구한 전투라는 서술이 그 뒤로 이어졌다.

지금은 신중하게 본다.

당시 이슬람군의 원정은 정복이 아니라 약탈에 가까웠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베리아반도에서도 우마이야는 내부 분열을 겪는 중이었다. 갈리아 북부는 기후와 지형이 그들의 방식에 맞지 않았다.

즉 이 전투에서 졌더라도 유럽 전체가 이슬람권이 됐으리라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남는 것이 있다. 이 승리가 카롤링거 가문의 정통성을 세웠고, 그 가문이 서유럽을 하나로 묶어 프랑크 제국을 만들었으며, 그것이 프랑스와 독일과 유럽이라는 관념의 출발점이 됐다.

한 전투의 의미를 시대마다 다르게 읽어 온 사례로도 함께 인용된다. 지금 이 전투는 문명 충돌의 상징으로 극우 진영에서 자주 호출된다. 1,300년 전 하루가 오늘의 정치 언어로 쓰이는 것이다.

지도에서 보기: 7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탈라스 전투 우마이야의 이베리아 정복 안사의 난 카롤루스의 색슨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