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의 색슨 전쟁

3000
카메라 투어 · 아무 곳이나 누르면 멈춤
◀ 왼쪽 · 오른쪽 ▶
지도에 표시
주요 국가
오른쪽 게이지를 끌거나 키보드 ↑↓로 5천 년이 흐릅니다
지도는 휠·더블클릭·드래그 · PgUp/PgDn은 스냅샷 이동
게이지를 Shift+드래그하면 10배 정밀 · 오른쪽 눈금은 인물·전쟁·사건이 있는 자리

6억 년 전
AD 2025
시대
주요 공격
주요 공격
국사

지질시대

기후

조산운동

생물과 공룡

대멸종

인류의 이동

그 해의 정치

세 개의 세계

라틴 유럽·비잔틴·이슬람이 지중해를 나눠 가졌다. 카롤루스의 제국은 곧 쪼개졌고 바이킹과 마자르가 유럽을 휘저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당이 무너지고 송이 섰다.

한반도

남북국시대

신라가 당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을 통일했고 북쪽에는 발해가 섰다. 신라 말 호족이 일어나며 후삼국으로 갈라진다.

전쟁 1건

카롤루스의 색슨 전쟁772 – 804
프랑크 vs 색슨족

라인강 동쪽의 색슨족을 정복하고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다. 색슨은 30년 넘게 봉기를 반복했다.

이르민술 파괴 772베르덴 학살 782

결과4,500명을 하루에 처형한 베르덴 학살이 저항을 더 키웠다. 결국 정복했고, 이 정복으로 카롤루스는 800년 황제 대관을 받는다.

32년 · 유럽 기독교권의 확장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4명

두보예술760 · 안사의 난의 고통을 시로 남긴 시성(詩聖)
712 – 770

「나라는 부서졌으나 산하는 남았다」— 이백이 하늘의 시인이라면 두보는 땅의 시인이었다.

  • 「춘망」「석호리」 등 사회시
  • 안사의 난 중 유랑과 성도 초당 생활
  • 율시의 완성자
압둘 라흐만 1세정치756 · 몰살을 피해 도망친 왕자
731 – 788

아바스가 우마이야 일족을 몰살할 때 혼자 살아 다섯 해를 도피해 이베리아에 닿았다. 거기서 코르도바에 나라를 세웠고 300년을 갔다.

  • 5년의 도피
  • 코르도바 후우마이야 건국
  • 코르도바 대모스크 착공
이백예술750 · 술과 달의 시인
AD 701 – AD 762

관직에는 오래 붙어 있지 못하고 평생을 떠돌았다. 즉흥으로 지은 시 1,000여 편이 남았다.

  • 당시(唐詩)의 정점 — 「시선」이라 불림
  • 안사의 난에 휘말려 유배
  •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죽었다는 전설
간무 천황정치794 · 수도를 옮긴 천황
737 – 806

나라의 큰 절들이 정치에 개입하자 수도를 헤이안쿄로 옮겼다. 새 도성에는 사찰을 함부로 못 짓게 했다. 이 도시가 이후 1,074년간 수도였다.

  • 794년 헤이안쿄 천도
  • 장안을 본떴으나 성벽은 짓지 않았다

그 무렵의 사건

800
카롤루스의 대관
교황이 프랑크 왕에게 황제관을 씌웠다. 서유럽이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기 시작한다.
서유럽이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교황과 황제의 오랜 다툼도 여기서 싹튼다.
800
절벽 위의 마을
푸에블로 사람들이 벼랑에 집을 지었다.
콜로라도의 절벽 아래 오목한 곳에 돌집을 층층이 올렸다. 사다리를 걷으면 아무도 못 들어온다. 13세기 말 큰 가뭄이 오자 사람들이 모두 떠났고, 후손이 오늘의 호피와 주니다.
818
발해의 전성기(해동성국)
발해는 선왕 때에 이르러 옛 고구려와 부여의 영토 대부분을 아우르는 최대 영역을 이루며 전성기를 맞아, 중국으로부터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이라 불렸다.
발해는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세운 나라로,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식을 분명히 했다. 9세기 선왕 때에 이르러 만주 대부분과 연해주, 한반도 북부에 걸친 최대 영토를 확보하고 지방 행정 제도를 5경 15부 62주로 정비해 안정적인 통치 체제를 갖췄다. 당시 당나라를 비롯한 주변국들은 발해의 융성함을 인정해 '해동성국'이라 부르며 대등한 이웃 나라로 대우했다.
830
지혜의 집
바그다드의 번역 기관. 그리스·인도·페르시아의 책이 아랍어로 옮겨져 유럽으로 되돌아갔다.
칼리파 알마문은 꿈에 아리스토텔레스를 보았다며 번역을 후원했다고 전한다.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 같은 학자들이 갈레노스·유클리드·프톨레마이오스를 옮겼고, 알콰리즈미는 여기서 대수학과 인도 숫자를 정리했다. 이 책들이 톨레도와 시칠리아에서 라틴어로 다시 번역되지 않았다면 12세기 르네상스도 없었다. 1258년 몽골이 바그다드를 함락하며 장서는 티그리스에 버려졌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카롤루스의 색슨 전쟁

전쟁 · 772 · 33년의 개종 전쟁

라인강 동쪽의 색슨족을 정복하고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다. 색슨은 30년 넘게 봉기를 반복했다. 4,500명을 하루에 처형한 베르덴 학살이 저항을 더 키웠다. 결국 정복했고, 이 정복으로 카롤루스는 800년 황제 대관을 받는다.

【그때 그 자리】 8세기 후반이다. 프랑크 왕국은 이미 기독교 국가였다.

그 동북쪽, 지금의 독일 북부에 색슨족이 있었다. 왕이 없었다 — 부족 회의로 움직이는 여러 집단이었다.

그래서 항복을 받아 낼 상대가 없었다. 한 집단과 화약을 맺어도 다른 집단이 다시 쳐들어왔다.

【왜 그렇게 됐나】 772년 카롤루스가 원정을 시작했다.

첫 목표가 이르민술이었다. 색슨의 성스러운 기둥으로, 세계를 떠받치는 나무를 상징했다.

그것을 베어 넘겼다. 종교 전쟁임을 처음부터 밝힌 것이다.

카롤루스에게 개종과 복속은 하나였다. 세례를 받는 것이 곧 프랑크 왕국의 신민이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흘렀나】 33년을 끌었다. 열여덟 차례 원정했다.

비두킨트라는 지도자가 저항의 중심이었다. 물러섰다가 카롤루스가 다른 곳으로 가면 다시 일어났다.

782년 페르덴에서 색슨 포로 4,500명을 하루에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다. 프랑크 연대기에 적혀 있다.

숫자가 과장이라는 견해, 「처형」이 아니라 「강제 이주」의 오기라는 견해가 있다. 그래도 규모 있는 학살이 있었다는 데는 이견이 적다.

「색슨 지방 칙령」을 냈다. 세례를 거부하면 사형, 사순절에 고기를 먹으면 사형, 화장(火葬)하면 사형이었다.

너무 가혹하다는 비판이 안에서도 나왔다. 알퀸이 편지에 적었다 — 「믿음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니다.」

797년 칙령을 완화했다.

【그래서】 785년 비두킨트가 세례를 받았다. 카롤루스가 대부가 됐다.

804년에야 끝났다. 마지막으로 엘베강 북쪽 주민 수천 명을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남은 것】 유럽의 판이 바뀌었다. 프랑크 왕국이 라인강을 넘어 엘베강까지 갔다.

그 넓이가 800년 카롤루스의 황제 대관식의 바탕이 된다. 서유럽이 하나의 기독교 세계로 묶인 것이다.

색슨 지방이 뒤에 신성로마제국의 중심 가운데 하나가 된다. 오토 왕조가 색슨 출신이다.

700년 뒤 마르틴 루터가 그 땅에서 나온다.

독일에서 카롤루스(카를 대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오래 논쟁이었다. 국가의 아버지로 보는 쪽과, 색슨을 학살한 프랑크 정복자로 보는 쪽이 갈렸다.

지금 유럽연합이 주는 상 가운데 「카를 대제 상」이 있다. 유럽 통합에 기여한 사람에게 준다.

지도에서 보기: 7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안사의 난 탈라스 전투 바이킹 시대 투르-푸아티에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