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라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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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세 개의 세계

라틴 유럽·비잔틴·이슬람이 지중해를 나눠 가졌다. 카롤루스의 제국은 곧 쪼개졌고 바이킹과 마자르가 유럽을 휘저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당이 무너지고 송이 섰다.

한반도

남북국시대

신라가 당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을 통일했고 북쪽에는 발해가 섰다. 신라 말 호족이 일어나며 후삼국으로 갈라진다.

전쟁 1건

탈라스 전투751
아바스 칼리파국 vs 당

중앙아시아 패권을 두고 서진하던 당과 동진하던 아바스가 처음으로 마주쳤다.

탈라스 751

결과당이 패해 중앙아시아에서 물러났다. 포로를 통해 제지술이 이슬람권에 전해졌다.

닷새 · 당군이 대부분 상실되고 제지술이 서쪽으로 갔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4명

이백예술750 · 술과 달의 시인
AD 701 – AD 762

관직에는 오래 붙어 있지 못하고 평생을 떠돌았다. 즉흥으로 지은 시 1,000여 편이 남았다.

  • 당시(唐詩)의 정점 — 「시선」이라 불림
  • 안사의 난에 휘말려 유배
  •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죽었다는 전설
압둘 라흐만 1세정치756 · 몰살을 피해 도망친 왕자
731 – 788

아바스가 우마이야 일족을 몰살할 때 혼자 살아 다섯 해를 도피해 이베리아에 닿았다. 거기서 코르도바에 나라를 세웠고 300년을 갔다.

  • 5년의 도피
  • 코르도바 후우마이야 건국
  • 코르도바 대모스크 착공
두보예술760 · 안사의 난의 고통을 시로 남긴 시성(詩聖)
712 – 770

「나라는 부서졌으나 산하는 남았다」— 이백이 하늘의 시인이라면 두보는 땅의 시인이었다.

  • 「춘망」「석호리」 등 사회시
  • 안사의 난 중 유랑과 성도 초당 생활
  • 율시의 완성자
카를 마르텔장군732 · 망치라 불린 사람
AD 688 – AD 741

궁재로서 왕보다 실권을 쥐었다. 투르에서 우마이야 기병을 보병 방진으로 막아냈다.

  • 투르-푸아티에 전투 732
  • 교회 재산으로 기병을 육성
  • 카롤루스 대제의 할아버지

그 무렵의 사건

800
카롤루스의 대관
교황이 프랑크 왕에게 황제관을 씌웠다. 서유럽이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기 시작한다.
서유럽이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교황과 황제의 오랜 다툼도 여기서 싹튼다.
800
절벽 위의 마을
푸에블로 사람들이 벼랑에 집을 지었다.
콜로라도의 절벽 아래 오목한 곳에 돌집을 층층이 올렸다. 사다리를 걷으면 아무도 못 들어온다. 13세기 말 큰 가뭄이 오자 사람들이 모두 떠났고, 후손이 오늘의 호피와 주니다.
700
스리위자야의 번성
땅이 아니라 바닷길을 지배해 부를 쌓은 나라였다.
수마트라 팔렘방을 중심으로 말라카 해협을 장악해 인도와 중국을 잇는 배들에게 통행세를 물렸다. 7세기 중국 승려 의정은 이곳에 승려 1천 명이 공부하는 불교 학문 중심지가 있다고 기록했다. 농사보다 무역에 기댄 「바다의 나라」였던 셈이다. 1025년 인도 남부의 촐라 왕조가 함대를 보내 왕도를 약탈했다 — 남아시아 해군력이 동남아시아까지 미친 드문 사례다. 이후 항구에 토사가 쌓이고 다른 항구들이 크며 서서히 저물었다.
698
발해 건국
고구려 유민과 말갈이 만주에 세운 나라. 스스로 고구려를 잇는다고 밝혔다.
고구려 유민이 만주에 세운 나라. 스스로 고구려를 잇는다고 밝혔다.
818
발해의 전성기(해동성국)
발해는 선왕 때에 이르러 옛 고구려와 부여의 영토 대부분을 아우르는 최대 영역을 이루며 전성기를 맞아, 중국으로부터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이라 불렸다.
발해는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세운 나라로,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식을 분명히 했다. 9세기 선왕 때에 이르러 만주 대부분과 연해주, 한반도 북부에 걸친 최대 영토를 확보하고 지방 행정 제도를 5경 15부 62주로 정비해 안정적인 통치 체제를 갖췄다. 당시 당나라를 비롯한 주변국들은 발해의 융성함을 인정해 '해동성국'이라 부르며 대등한 이웃 나라로 대우했다.
682
신문왕의 왕권 강화
삼국통일 직후 즉위한 신라 신문왕은 반란을 진압해 진골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국학을 세워 왕권 중심의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
신문왕은 즉위 직후 장인이자 유력 진골 귀족이던 김흠돌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이에 연루된 귀족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귀족에게 지급하던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해 귀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켰으며,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국립 교육기관 국학을 세워 왕에게 충성하는 관료를 길러냈다. 지방을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해 넓어진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릴 기반도 마련했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탈라스 전투

전쟁 · 751 · 아바스 칼리파국 vs 당

중앙아시아 패권을 두고 서진하던 당과 동진하던 아바스가 처음으로 마주쳤다. 당이 패해 중앙아시아에서 물러났다. 포로를 통해 제지술이 이슬람권에 전해졌다.

【그때 그 자리】

8세기 중반 두 제국이 중앙아시아에서 만났다.

동쪽에서 당이 왔다. 현종의 개원의 치로 절정에 있었고, 서역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안서도호부 아래 두었다.

서쪽에서 아바스가 왔다. 750년 우마이야를 뒤엎고 막 들어선 참이었다.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그 사이에 소그드인의 도시들이 있었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와 타슈켄트다. 이들은 실크로드 무역을 쥔 상인 집단이었다.

【왜 그렇게 됐나】

직접 계기는 당의 실책이었다.

안서절도사 고선지가 750년 석국, 지금의 타슈켄트를 쳤다. 조공이 불성실하다는 이유였다. 항복을 받고도 약속을 어겨 왕을 장안으로 보내 처형했다.

살아남은 왕자가 아바스에 도움을 청했다. 주변 도시들도 등을 돌렸다.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668년 고구려가 무너진 뒤 당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후손이다. 그가 당의 장군이 되어 파미르를 넘고 소발률국을 정복한 것은 당대에도 놀라운 일로 기록됐다. 외국인이 최고 지휘관이 되는 것이 가능했던 시대다.

【어떻게 흘렀나】

751년 7월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탈라스강 부근에서 맞붙었다.

닷새를 버텼다. 그런데 당군에 소속돼 있던 카를루크족이 배신해 아바스 쪽으로 돌아섰다. 앞뒤로 협공당한 당군이 무너졌다.

고선지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겨우 빠져나왔다.

【그래서】

군사적 결과는 제한적이었다. 아바스는 더 동쪽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당도 곧바로 큰 손실을 입지는 않았다.

진짜 변화는 4년 뒤에 왔다.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 당이 서역에서 병력을 빼야 했다. 고선지도 이 난의 초기에 참전했다가 모함으로 처형됐다.

당이 물러난 자리에 이슬람이 들어왔다. 중앙아시아가 이슬람권이 되는 출발점이 이때다. 지금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이 이슬람 국가인 것이 이 흐름의 결과다.

【남은 것】

이 전투가 세계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붙잡힌 당군 포로 가운데 제지 기술자가 있었다는 기록이다. 두환이라는 포로가 12년 뒤 돌아와 남긴 경행기가 이 이야기의 근거다.

이후 사마르칸트에 제지소가 서고, 793년 바그다드에 제지 공장이 생겼다. 종이가 서쪽으로 퍼져 나가는 길이 열렸다.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에서 그리스어와 산스크리트어 문헌이 대량으로 번역될 수 있었던 것은 종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값싼 기록 매체 없이는 그만한 양의 번역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길로 종이가 이슬람 에스파냐를 거쳐 유럽에 닿았다. 1450년 무렵 구텐베르크가 활자를 만들었을 때 유럽에는 이미 값싼 종이가 있었다.

다만 종이가 오직 이 전투 하나로 전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그전에도 교역로를 통해 종이가 오갔다는 증거가 있다.

그래도 이 전투는 상징적이다. 두 문명이 딱 한 번 정면으로 부딪쳤고, 그 자리에서 물건이 아니라 만드는 법이 넘어갔다.

지도에서 보기: 7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안사의 난 투르-푸아티에 전투 카롤루스의 색슨 전쟁 우마이야의 이베리아 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