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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국가 단위로 갈라져 싸웠다. 신앙이 곧 국제 정치였고 30년전쟁이 그 정점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달아 겪었다. 국토가 황폐해지고 명청 교체 속에서 북벌론과 실학이 함께 나왔다.
왜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중과세와 가톨릭 강요에 개신교(칼뱅파)가 강한 네덜란드 북부 주들이 반발했다.
결과80년에 걸친 전쟁 끝에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독립을 공식 인정했다. 흔히 '80년 전쟁'으로도 불린다.
왜우랄산맥 동쪽의 모피(담비 가죽)를 노린 스트로가노프 상단이 코사크 두목 예르마크를 고용해 시비르 칸국을 쳤다.
결과예르마크는 1585년 야습으로 죽었지만 정복은 멈추지 않았다. 코사크들은 강을 따라 요새(오스트로그)를 하나씩 세우며 동쪽으로 밀고 나가 1639년 태평양에 닿았다 — 우랄을 넘은 지 60년도 안 된 때다.
왜보헤미아에서 개신교 귀족이 황제의 관리를 창밖으로 던졌다. 신성로마제국 내부의 종교 갈등에 주변 강대국이 세력 다툼으로 끼어들었다.
결과독일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주권국가 체제가 자리 잡는다.
왜후금이 청을 세우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했다. 조선 조정이 명에 대한 의리를 들어 거부했다.
결과두 달 만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끌려갔다.
확실한 것을 찾으려 모든 것을 의심했고, 의심하는 자신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데서 멈췄다.
직접 만든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과 금성의 위상을 봤다.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증거였고, 그 대가로 여생을 가택 연금으로 보냈다.
아내 뭄타즈 마할이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 죽자 무덤을 짓기 시작했다. 22년이 걸렸다. 말년에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갇혀 그 무덤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죽었다.
기동성 있는 보병과 경포병으로 근대 전술을 열었다. 브라이텐펠트에서 이기고 뤼첸에서 이기며 죽었다.
위그노의 요새를 부수고 귀족의 성을 헐었으며, 가톨릭 추기경이면서 개신교 스웨덴에 돈을 대 합스부르크를 견제했다.
심장이 뿜는 피의 양을 계산해 혈액이 몸을 순환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시골 젠트리 출신으로 내전에서 철기병을 길러 왕당파를 꺾었다. 왕을 처형했지만 스스로 왕에 가까운 권력을 쥐었다.
도박에서 확률론을 끌어내다
형제들을 제거하고 아버지 샤 자한을 유폐시킨 뒤 제위에 올랐다. 남인도까지 정복해 무굴 제국을 최대 영토로 넓혔으나, 이슬람 정통주의 정책으로 힌두교도와의 갈등을 키워 제국 쇠퇴의 씨앗도 함께 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재상 없이 직접 통치하며 72년간 프랑스를 다스렸다. 베르사유 궁전을 지어 귀족을 곁에 묶어두고 왕권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서자 출신으로 어의가 됐다. 전쟁으로 약재가 끊긴 나라에서 우리 땅에서 나는 약으로 고치는 법을 정리했다.
근대 화학의 문을 열다
바스쿠 다 가마 이후 400년.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 닿는 길이 열리며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밀려났다.
유럽의 공산품 → 아프리카의 노예 → 아메리카의 설탕·면화 → 유럽. 세 대륙이 하나의 경제로 묶였다.
전쟁 · 1636 · 조선 vs 청
후금이 청을 세우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했다. 조선 조정이 명에 대한 의리를 들어 거부했다. 두 달 만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끌려갔다.
【그때 그 자리】
1636년의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38년 된 나라였다. 전쟁으로 인구가 줄고 토지대장이 망가진 채 복구가 덜 됐다.
북쪽에서는 판이 뒤집히는 중이었다. 누르하치가 1616년 후금을 세우고 1619년 사르후에서 명군 10만을 이겼다. 광해군은 이 흐름을 읽고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처신하라고 했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완전히 걸지 않은 것이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이 줄타기를 끊었다. 반정의 명분 자체가 오랑캐와 화친하고 명을 배신했다는 것이었으니 새 정권은 친명을 버릴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됐나】
1627년 정묘호란으로 형제 관계를 맺었다. 1636년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하며 군신 관계를 요구했다. 조정은 척화로 기울었다. 문제는 명분을 세운 만큼의 준비가 없었다는 것이다. 청은 이미 만주와 몽골을 아울렀고 홍이포까지 갖췄다.
【어떻게 흘렀나】
1636년 12월 청군 12만이 압록강을 건넜다. 정묘호란 때처럼 성을 하나씩 치지 않고 곧장 한양으로 내달렸다. 선봉이 닷새 만에 닿았다. 인조는 강화도로 가려다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45일이었다. 산성 안에 1만 3천 명, 식량은 두 달치가 못 됐다. 한겨울에 얼어 죽는 군사가 나왔다. 각지의 근왕군은 오는 족족 깨졌다. 1637년 1월 강화도가 함락되고 왕자와 비빈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그래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갔다. 수십만 명이 끌려갔고 돈을 주고 돌아온 여자들에게 환향녀라는 말이 붙었다. 피해자가 다시 손가락질을 받은 것이다.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8년을 살며 서양 문물과 청의 실력을 봤고 1645년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죽었다. 왕위는 동생 봉림대군에게 갔다. 효종이 되어 북벌을 내걸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남은 것】
청은 1644년 베이징에 들어가 260년을 갔다. 조선은 청을 섬기면서 속으로는 오랑캐로 여기는 이중 상태로 오래 지냈다. 소중화 의식이 그것이다. 남한산성 안에서 최명길이 항복 문서를 쓰고 김상헌이 그것을 찢은 장면은, 명분과 생존이 부딪힐 때 무엇을 택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지금도 인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