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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로마가 지중해를 장악했지만 그 부가 공화정을 무너뜨렸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개혁이 유혈로 끝나고, 군벌들이 사병을 거느리며 내전이 반복됐다.
고조선이 무너지고 한의 군현이 설치됐다. 저항 속에서 부여·옥저·동예 같은 정치체가 자라났다.
해당 없음
자기 군대를 이끌고 로마 시내로 진군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처음 넘었고, 이후 카이사르가 같은 길을 간다.
장군을 변호하다 궁형을 받았다. 죽는 대신 살아서 아버지가 시작한 역사를 끝냈다.
카틸리나의 음모를 폭로하고 안토니우스를 탄핵했다. 그의 라틴어 문장은 유럽 산문의 교과서가 됐다.
지중해 해적을 석 달 만에 소탕하고 동방을 정복했으나, 삼두정치가 깨진 뒤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에게 졌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인물 · BC 82 · 로마에 군대를 끌고 들어간 첫 사람
자기 군대를 이끌고 로마 시내로 진군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처음 넘었고, 이후 카이사르가 같은 길을 간다.
【그때 그 자리】 BC 1세기 초 로마. 귀족파(옵티마테스)와 평민파(포풀라레스)가 갈려 있었다.
몰락한 귀족 집안에서 났다. 젊을 때 가난했고 배우들과 어울렸다.
유구르타 전쟁에서 마리우스의 부관으로 공을 세웠다. 유구르타를 붙잡아 온 것이 그였다 — 마리우스가 그 공을 가로챘다고 여겨 사이가 틀어졌다.
【왜 그렇게 됐나】 BC 88년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지휘권을 받았다. 그런데 민회가 그것을 뒤집어 마리우스에게 넘겼다.
술라가 군대를 돌려 로마로 진군했다. 로마 역사에서 로마군이 로마를 친 첫 사례다.
그때까지 군대는 성벽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장교들이 거의 다 따르기를 거부하고 떠났다 — 그래도 병사들은 따라갔다.
마리우스의 군 개혁 때문이다. 재산이 없는 사람도 병사가 되면서, 제대 후 땅을 받는 것이 지휘관에게 달렸다. 병사가 나라가 아니라 장군에게 충성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흘렀나】 동방으로 가서 미트리다테스를 꺾고 돌아왔다. 그 사이 로마는 마리우스파가 잡고 있었다.
BC 82년 다시 로마로 진군해 이겼다. 그리고 독재관이 됐다 — 기한이 없는 독재관은 처음이었다.
「프로스크립티오」를 시작했다. 명단을 광장에 붙이고, 거기 이름이 있으면 누구든 죽여도 되며 재산은 몰수해 나눈다는 것이다.
수천 명이 죽었다. 원한 때문에, 또는 그저 땅이 탐나서 이름이 올라간 경우도 많았다.
젊은 카이사르도 명단에 오를 뻔했다. 마리우스의 조카사위였기 때문이다. 주변의 청으로 빠졌는데, 술라가 「저 아이 안에 마리우스가 여럿 있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 원로원의 권한을 키우고 호민관을 무력화하는 개혁을 했다. 귀족 공화정을 되살리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BC 79년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시골로 갔다. 이듬해 죽었다.
【남은 것】 그가 만든 제도는 곧 무너졌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그것을 되돌렸다.
무너지지 않은 것은 다른 쪽이다 — 군대를 가진 자가 로마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40년 뒤 카이사르가 루비콘을 건널 때, 그것이 전례 없는 일이 아니었다. 술라가 이미 두 번 했다.
공화정을 지키려 한 사람이 공화정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쳤다.
지도에서 보기: BC 1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사마천 키케로 폼페이우스 카이사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