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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공화정의 외피를 남긴 채 1인 지배를 세웠다. 200년간 지중해 전역에 큰 전쟁이 없었고 속주마다 도시와 도로와 수도교가 깔렸다.
신라·고구려·백제가 차례로 서고 가야가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았다. 아직 연맹왕국 단계로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
왜동방에서 돌아온 군대가 옮긴 역병으로 국경 수비가 얇아지자, 다뉴브 너머 부족들이 밀고 들어왔다.
결과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전선 막사에서 「명상록」을 썼다. 이 전쟁 이후 게르만족의 압력은 다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재위 내내 전쟁과 역병에 시달렸다. 다뉴브 전선의 천막에서 자기에게 하는 말을 그리스어로 적었다.
1400년을 지배한 우주 모형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인물 · 170 · 막사에서 일기를 쓴 황제
재위 내내 전쟁과 역병에 시달렸다. 다뉴브 전선의 천막에서 자기에게 하는 말을 그리스어로 적었다.
【그때 그 자리】
2세기 로마는 팍스 로마나의 절정에 있었다. 지중해 전역이 하나의 체제 아래 있고 큰 전쟁이 없었다.
이 시기 다섯 황제가 잇달아 잘 다스려 오현제라 불린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공통점이 있다. 앞의 넷은 아들이 없어 유능한 사람을 양자로 삼아 물려줬다. 혈통이 아니라 능력으로 후계를 정한 것이다. 이것이 이 시기 안정의 이유로 자주 꼽힌다.
【왜 그렇게 됐나】
마르쿠스는 어려서부터 철학에 끌렸다. 스토아 철학이다.
스토아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라.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마음을 쓰지 말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자기 판단과 태도뿐이다. 그리고 사람은 이성을 나눠 가진 존재이므로 서로에게 의무가 있다.
그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아버지 안토니누스가 죽자 자리를 맡았다.
161년 즉위하면서 그는 양동생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삼았다. 로마 역사상 처음이다.
【어떻게 흘렀나】
그의 치세는 평온하지 않았다.
동쪽에서 파르티아와 전쟁이 있었다. 그 군대가 돌아오면서 역병을 가져왔다. 안토니누스 역병이다. 15년 넘게 이어져 제국 인구의 상당 부분이 죽었다. 천연두로 추정된다.
북쪽 국경에서 게르만 부족이 밀려왔다. 마르코만니 전쟁이 그의 치세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는 20년 가까이 다뉴브강 전선의 막사에서 지냈다.
철학을 좋아한 사람이 평생 전쟁터에 있었다.
그가 밤에 막사에서 그리스어로 쓴 글이 남았다. 남에게 보이려 쓴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하는 말이었다. 제목도 자기 자신에게라는 뜻이다. 우리는 명상록이라 부른다.
첫 권은 자기가 누구에게 무엇을 배웠는지를 적은 감사의 목록이다. 그 뒤로는 계속 자기를 다잡는 말이 이어진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을 때 이렇게 생각하라, 나는 사람이 할 일을 하러 일어난다. 남이 잘못을 저지르면 화내지 말고 그가 무엇이 옳은지 몰랐다고 생각하라.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아시아와 유럽도 한 귀퉁이이고 사람의 일생도 한순간이다.
180년 다뉴브 전선에서 죽었다.
【그래서】
그는 오현제의 원칙을 깼다. 친아들 콤모두스에게 물려줬다.
콤모두스는 검투사 흉내를 내며 놀았고 폭정을 폈으며 192년 암살됐다. 이후 로마는 내전과 군인 황제의 시대로 들어간다.
3세기의 위기가 여기서 시작된다는 서술이 많다. 가장 현명했던 황제의 마지막 결정이 그것이었다.
【남은 것】
명상록은 오래 잊혔다가 16세기에 인쇄됐다.
지금도 널리 읽힌다. 전쟁과 역병과 반란 속에서 하루하루 자기를 다잡던 사람의 기록이라는 점 때문이다. 무엇을 이루라는 말이 아니라 어떻게 견디라는 말이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지 않았다. 그의 치세에 박해가 있었다. 명상록에도 기독교인의 순교를 고집으로 언급한 대목이 있다.
자기 아들에 대한 판단만은 끝내 흐렸다는 점이, 이 사람을 완전한 현자로 읽지 못하게 한다. 그것이 오히려 이 기록을 사람의 글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