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흥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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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억 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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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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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조산운동

생물과 공룡

대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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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몽골의 세기

유라시아 대부분이 한 왕조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역참으로 동서가 이어져 사람과 물자와 역병이 함께 흘렀다.

한반도

원 간섭기

몽골과 강화한 뒤 원의 부마국이 됐다. 공민왕이 반원 개혁을 시도했지만 왕조는 이미 기울었다.

전쟁 1건

바익당강 전투1288
대월 vs 원

몽골이 세 번째로 대월을 쳤다. 앞선 두 번도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함대를 앞세웠다.

바익당강

결과쩐흥다오가 강바닥에 쇠 씌운 말뚝을 박아 두고 썰물을 기다렸다. 물이 빠지자 원의 함선이 말뚝에 걸려 부서졌다. 몽골이 바다에서 크게 진 몇 안 되는 예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5명

쩐흥다오장군1288 · 몽골을 세 번 막은 장수
1228 무렵 – 1300

대월의 장수로 몽골의 세 차례 침입을 막았다. 1288년 바익당강 바닥에 쇠말뚝을 박아 두고 썰물에 함대를 걸리게 했다.

  • 바익당강 — 강바닥 말뚝
  • 몽골 침입 3회 격퇴
  • 격장사 — 병사에게 부친 글
오스만 1세정치1299 · 오스만 제국의 이름이 된 초대 군주
1258 – 1326 무렵, 재위 1299 – 1326

아나톨리아 북서부의 작은 튀르크계 공국을 세워 비잔티움 국경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의 이름을 딴 오스만 왕조는 이후 600년 넘게 이어지며 세 대륙에 걸친 제국으로 성장했다.

  • 1299년 독립 공국 선포로 오스만 왕조 시작
  • 비잔티움 변경에서 성전(가지) 전사로 명성을 쌓음
  • 아들 오르한 때 부르사를 수도로 삼음
마르코 폴로탐험1275 · 쿠빌라이의 궁정을 유럽에 알린 베네치아 상인
1254 – 1324

17년을 원나라에서 보내고 돌아와 감옥에서 구술한 「동방견문록」이 콜럼버스를 바다로 이끌었다.

  • 실크로드를 거쳐 원 대도 도착(1275)
  • 쿠빌라이 칸 아래서 17년 체류
  • 「동방견문록」 구술(1298)
쿠빌라이 칸정치1271 · 원 세조
1215 – 1294

국호를 대원으로 정하고 남송을 무너뜨렸다. 중국 전역이 처음으로 유목 왕조 아래 들어갔다.

  • 국호를 대원으로 1271
  • 남송을 무너뜨림 1279
  • 대도(오늘의 베이징) 건설
토마스 아퀴나스사상1270 · 신앙과 이성을 하나로 엮은 스콜라 철학의 완성자
1225 – 1274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 안으로 들여왔다. 「신학대전」은 가톨릭 신학의 기둥이 됐다.

  • 「신학대전」「대이교도대전」
  •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기독교적 수용
  • 신 존재의 다섯 가지 길

그 무렵의 사건

1291
스위스 연방 성립
1291년, 알프스 산속 세 계곡 공동체(우리·슈비츠·운터발덴)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맞서 서로 돕기로 서약하며 스위스 연방의 첫 씨앗을 뿌렸다.
이후 여러 산악 공동체와 도시들이 하나둘 이 동맹에 합류하며 서서히 몸집을 키웠고, 지형적 이점을 살린 저항으로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지켜냈다. 오랜 중립 전통은 이후 국제 외교와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1280
폴리네시아의 항해
나침반 없이 태평양을 건넜다.
별의 위치, 물결이 섬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결, 새가 날아가는 방향을 읽었다. 하와이에서 뉴질랜드까지 태평양 전역에 같은 계통의 사람들이 퍼졌다. 유럽이 대양으로 나가기 수백 년 전이다.
1300
짐바브웨의 번성과 쇠퇴
모르타르 없이 돌만 쌓아 사하라 이남 최대의 석조 도시를 세웠다.
쇼나족이 세운 도시로, 중국 도자기와 페르시아 유리구슬이 나올 만큼 먼 곳과 교역했다. 20세기 초 백인 식민 당국은 「아프리카인이 이런 걸 지었을 리 없다」며 페니키아인이나 아랍인의 것이라 주장했다 — 1929년 고고학자 캐턴톰프슨의 발굴로 완전한 아프리카 기원임이 확인됐다. 왜 1450년 무렵 버려졌는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 교역로가 해안으로 옮겨갔다는 설, 삼림 파괴와 지력 소진이라는 설, 소빙하기 가뭄이라는 설이 나란히 있다.
1324
말리 제국의 전성기
14세기, 서아프리카의 말리 제국은 황금과 소금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부유하고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황제 만사 무사가 1324년 메카 순례길에 어마어마한 금을 뿌리듯 쓴 일화는 오늘날까지도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개인의 사례로 회자된다. 그가 지나간 카이로 등지에서는 이 대량의 금 유입으로 물가가 한동안 폭등했을 정도였다. 제국의 중심지 팀북투는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도 이름을 떨쳐, 서아프리카 곳곳에서 학자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후 내부 계승 다툼과 외부 세력의 압박으로 15~16세기에 걸쳐 서서히 쇠퇴했다.
1251
팔만대장경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길 기원하며 16년에 걸쳐 8만 장이 넘는 목판에 불경 전체를 새긴 팔만대장경을 완성했다.
거란의 침입 때도 대장경을 만들어 위기를 넘긴 전례가 있었는데, 그 초조대장경은 몽골 침입 때 불타 없어졌다.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몽골에 항전하던 고려 조정은, 온 나라의 정성을 모아 부처의 가피를 구한다는 뜻에서 다시 대장경 조판 사업을 벌였다. 8만여 장에 이르는 목판에 새긴 5천만 자가 넘는 글자는 오탈자가 거의 없을 만큼 정교해, 오늘날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대장경 판본 중 하나로 꼽히며 경남 합천 해인사에 보관돼 있다.
1234
금속활자
고려가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찍었다.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이르다.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이르다. 다만 한자 문화권에서는 인쇄 혁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쩐흥다오

인물 · 1288 · 몽골을 세 번 막은 사람

대월의 장수로 몽골의 세 차례 침입을 막았다. 1288년 바익당강 바닥에 쇠말뚝을 박아 두고 썰물에 함대를 걸리게 했다.

【그때 그 자리】 13세기 다이비엣(베트남 쩐 왕조)이다.

몽골이 세 번 쳐들어왔다 — 1258년, 1285년, 1287~88년이다.

송을 무너뜨리고 고려를 굴복시키고 유라시아를 가로지른 군대였다. 인구 수백만의 나라가 상대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본명은 쩐꾸옥뚜언. 왕족이자 총사령관이었다.

【왜 그렇게 됐나】 아버지가 죽으며 왕위를 빼앗으라 유언했다고 전한다. 그가 따르지 않았다.

2차 침입 때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왕이 항복을 물었다. 그가 답했다. 「먼저 신의 목을 벤 뒤에 항복하십시오.」

「격장사(檄將士文)」를 지어 장수들에게 돌렸다. 「적의 목을 베지 못하고 (…) 나는 살가죽이 들판에 널리고 시체가 말발굽에 밟혀도 한이 없다」는 문장이 있다.

군사들이 팔에 「살달(殺韃) — 몽골을 죽인다」 두 글자를 새겼다고 전한다.

【어떻게 흘렀나】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수도 탕롱(하노이)을 비우고 물러섰다.

청야 전술이다. 곡식을 치우고 물러나 적을 굶겼다. 더운 기후와 풍토병이 몽골군을 갉았다.

그리고 3차 침입 때 바익당강에서 끝냈다.

밀물 때 강바닥에 끝을 뾰족하게 깎아 쇠를 씌운 말뚝을 박아 두었다. 물이 찼을 때 작은 배로 적 함대를 유인해 들어오게 하고, 썰물에 배들이 말뚝에 걸려 움직이지 못할 때 쳤다.

몽골 함대 400여 척이 궤멸했다. 사령관 오마르가 사로잡혔다.

같은 강에서 938년 응오꾸옌이 남한(南漢)을 상대로 같은 방법을 썼다. 그것을 다시 쓴 것이다.

【그래서】 몽골이 다시 오지 않았다. 쿠빌라이가 4차 원정을 준비하다 죽었다.

다이비엣은 형식적으로 조공을 보냈다. 그러나 다스림을 받지 않았다.

【남은 것】 유언이 전한다. 「적이 오래 끄는 것을 두려워하고 빨리 끝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 백성의 힘을 기르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베트남에서 「흥다오 대왕」으로 신격화됐다. 사당이 전국에 있다.

700년 뒤 보응우옌잡이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할 때 같은 방식으로 갔다 — 물러서고, 끌고, 지치게 하는 것이다.

하노이·호찌민시를 비롯한 거의 모든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지도에서 보기: 1279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오스만 1세 마르코 폴로 쿠빌라이 칸 토마스 아퀴나스 단테 만사 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