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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유라시아 대부분이 한 왕조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역참으로 동서가 이어져 사람과 물자와 역병이 함께 흘렀다.
몽골과 강화한 뒤 원의 부마국이 됐다. 공민왕이 반원 개혁을 시도했지만 왕조는 이미 기울었다.
왜문신이 무신을 천대하는 관행이 쌓였다. 의종의 보현원 행차에서 폭발했다.
결과정중부·경대승·이의민을 거쳐 최씨 정권이 60년을 이었다. 몽골 침입에 강화도로 옮겨 항전했고,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까지 물러나며 끝까지 싸웠다.
왜부족을 통일한 칭기즈 칸에게 유목 연합체를 유지할 전리품과 목초지가 필요했다. 호라즘이 사신단을 처형한 것이 서방 원정의 방아쇠가 됐다.
결과73년에 걸쳐 태평양에서 동유럽까지 이어지는 역사상 최대의 육상 제국이 만들어졌다.
왜쿠빌라이가 일본에 조공을 요구했으나 가마쿠라 막부가 거부했다. 고려는 함선과 병력을 대야 했다.
결과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궤멸했다. 일본에서는 이를 '신풍'이라 불렀다.
국호를 대원으로 정하고 남송을 무너뜨렸다. 중국 전역이 처음으로 유목 왕조 아래 들어갔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 안으로 들여왔다. 「신학대전」은 가톨릭 신학의 기둥이 됐다.
17년을 원나라에서 보내고 돌아와 감옥에서 구술한 「동방견문록」이 콜럼버스를 바다로 이끌었다.
대월의 장수로 몽골의 세 차례 침입을 막았다. 1288년 바익당강 바닥에 쇠말뚝을 박아 두고 썰물에 함대를 걸리게 했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인물 · 1271 · 원 세조
국호를 대원으로 정하고 남송을 무너뜨렸다. 중국 전역이 처음으로 유목 왕조 아래 들어갔다.
【그때 그 자리】
칭기즈 칸의 손자로 1215년에 났다. 몽골은 이미 유라시아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두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하나는 남송이다. 양쯔강과 수많은 성과 화약 무기를 갖춰 초원 기병이 쉽게 넘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방향이었다. 정복한 정주 지역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초원의 전통을 지키자는 쪽과 현지 방식을 받아들이자는 쪽이 갈렸다. 한때 몽골 안에서 화북의 농경지를 갈아엎어 목초지로 만들자는 논의까지 있었다. 세금을 걷는 편이 낫다는 야율초재의 설득으로 무산됐다.
【왜 그렇게 됐나】
쿠빌라이는 후자를 택했다. 젊어서부터 한족 지식인을 곁에 두고 배웠다.
1259년 몽케 칸이 죽자 동생 아릭 부케와 4년을 싸웠다. 이 다툼은 형제 싸움이자 노선 싸움이었다. 아릭 부케는 초원의 전통을 대표했고 쿠빌라이는 중국화를 대표했다.
쿠빌라이가 이겼다. 다만 이 내전으로 몽골 제국의 통일성이 깨졌다. 서쪽의 칸국들이 사실상 독립했다.
【어떻게 흘렀나】
1271년 국호를 원으로 정했다. 몽골식 이름이 아니라 주역의 대재건원에서 딴 한자 국호다. 수도를 대도, 지금의 베이징에 새로 지었다.
1279년 남송을 없앴다. 마지막에 어린 황제를 안고 신하가 바다에 뛰어들었다.
통치는 이중적이었다. 중국식 왕조의 겉을 갖추되, 신분을 몽골인·색목인·한인·남인으로 나눠 몽골인의 지배를 유지했다. 과거제를 오래 정지시켰다.
동시에 열려 있었다. 이슬람 천문학자를 데려와 역법을 고치게 했고, 티베트 불교를 우대했으며, 각지의 상인과 사절을 받았다. 마르코 폴로가 그의 궁정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밖으로는 계속 밀었다. 1274년과 1281년 일본 원정은 두 번 다 태풍으로 실패했다. 베트남과 자바 원정도 성과가 없었다. 초원과 다른 기후와 지형에서 몽골식 전쟁이 통하지 않았다.
고려와는 사위의 나라 관계를 맺었다. 1259년 고려 태자가 강화하러 왔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이 쿠빌라이다. 당 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한 나라의 태자가 스스로 왔다며 기뻐했다고 기록됐다. 고려가 왕조와 제도를 유지한 데는 이 첫 만남이 작용했다는 해석이 있다.
【그래서】
1294년 죽었다. 원은 그 뒤 74년을 더 갔다.
【남은 것】
그는 몽골 제국을 중국 왕조로 바꾼 사람이다. 이 선택 덕에 원이 중국을 100년 가까이 다스릴 수 있었고, 동시에 이 선택 때문에 서쪽 칸국들과 멀어졌다.
역참제로 유라시아가 이어져 사람과 물자와 정보가 오갔다. 화약과 나침반과 인쇄술이 서쪽으로 간 것도, 흑사병이 서쪽으로 간 것도 이 길이다.
영국 시인 콜리지가 1797년 쓴 시 쿠블라 칸이 서양에서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했다. 실제 인물과는 거의 상관없는 몽환적인 시다. 정복자의 이름이 낯선 동방의 상징으로 소비된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