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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50년 동안 황제가 스무 명 넘게 바뀌었다. 군대가 황제를 세우고 죽였으며 은화의 은 함량이 5퍼센트 아래로 떨어졌다. 국경이 동시에 뚫렸다.
신라·고구려·백제가 차례로 서고 가야가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았다. 아직 연맹왕국 단계로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
왜파르티아를 무너뜨린 사산조가 옛 아케메네스 영토의 회복을 내걸었다. 로마의 동방 속주가 바로 그 대상이었다.
결과에데사에서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사로잡혔다. 로마는 처음으로 대등한 상대를 만났다.
왜황제가 군대에 의해 세워지고 죽는 일이 반복됐다. 은화의 은 함량이 5%까지 떨어지며 물가가 폭등했다.
결과50년간 황제가 26명 바뀌고 제국이 셋으로 갈라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두정치로 겨우 봉합했지만 제국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졌다.
국력이 위의 5분의 1인 촉을 이끌고 다섯 번 북벌했다.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해석이 많다.
야마타이국의 여왕으로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친위왜왕 칭호와 거울 100장을 받았다. 나라가 어디였는지는 지금도 규슈설과 기나이설로 갈린다.
황건적 진압으로 이름을 얻고 헌제를 옹립해 명분을 쥐었다. 둔전제로 군량을 자급한 것이 다른 군벌과의 결정적 차이였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인물 · 234 ·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한 사람
국력이 위의 5분의 1인 촉을 이끌고 다섯 번 북벌했다.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해석이 많다.
【그때 그 자리】
3세기 초 유비는 마흔이 넘도록 근거지가 없었다. 조조와 원소 사이를 오가며 여러 차례 패해 형주의 유표에게 얹혀 있었다. 관우와 장비 같은 무장은 있었지만 전체를 설계할 사람이 없었다.
제갈량은 산둥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를 따라 형주로 왔다. 융중에서 밭을 갈며 살았다.
【왜 그렇게 됐나】
207년 유비가 세 번 찾아갔다. 삼고초려다. 스물일곱 살 무명의 선비를 마흔일곱의 유비가 세 번 찾은 것이다.
제갈량이 내놓은 것이 융중대다. 조조는 이미 강해 정면으로 못 이기고, 손권은 강동에 자리 잡아 함께 칠 수 없으니 동맹해야 한다. 그러니 형주와 익주를 얻어 셋으로 나눈 뒤 기회를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이 구상이 그대로 실현됐다. 천하가 셋으로 갈린 형세를 미리 그려 보인 것이다.
【어떻게 흘렀나】
208년 그는 손권을 설득해 동맹을 맺었다. 적벽에서 조조가 물러난 뒤 유비가 형주 남부를 얻고 익주로 들어가 221년 촉한을 세웠다.
그런데 융중대의 전제가 깨졌다. 219년 관우가 형주를 잃고 죽었다. 유비가 복수를 위해 오를 쳤다가 222년 이릉에서 대패했다. 동맹을 깨고 친 것이라 제갈량이 반대했던 원정이다.
223년 유비가 죽으며 후사를 부탁했다. 아들이 도울 만하면 돕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대신하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갈량은 울며 충성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그는 실제로 대신하지 않았다. 남쪽 이민족을 평정해 후방을 안정시키고, 오와 동맹을 복구했다. 그리고 227년부터 다섯 차례 북벌에 나섰다.
북벌은 성과가 없었다. 촉은 인구와 국력이 위의 5분의 1 수준이었다. 산길로 군량을 옮기는 것 자체가 한계였다. 그는 나무 소와 흐르는 말이라는 운송 기구를 만들어 썼다.
234년 오장원에서 위와 대치하던 중 병으로 죽었다. 쉰넷이었다.
【그래서】
촉은 29년을 더 갔다가 263년 멸망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왜 계속했는가는 오래된 물음이다. 가만히 있으면 국력 차이가 더 벌어지므로 공세로 시간을 벌어야 했다는 설명, 한 왕실을 잇는다는 명분을 놓으면 나라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는 설명이 함께 있다.
【남은 것】
그가 북벌에 나서며 올린 출사표가 남았다. 신은 본래 미천한 백성으로 남양에서 몸소 밭을 갈았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글을 읽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는 말이 오래 전한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그를 바람을 부르고 미래를 읽는 인물로 그렸다. 정사의 제갈량은 다르다. 진수는 그를 나라를 다스리는 재주는 뛰어났으나 임기응변의 장략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고 평했다. 즉 천재적인 전략가가 아니라 뛰어난 행정가이자 성실한 재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평가가 오히려 이 인물을 오래 남게 했다.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 맡은 일을 끝까지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다. 죽을 때까지 몸을 굽혀 온 힘을 다한다는 국궁진췌가 그의 글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