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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왜에데사 백국이 함락되자 베르나르의 설교로 두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결과다마스쿠스 포위 나흘 만에 철수하며 완패했다. 이 실패가 무슬림 세력을 결집시켜 살라흐 앗 딘의 등장을 앞당겼다.
코르도바의 법관이자 의사이자 철학자. 그의 주석 덕에 유럽이 잊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읽었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인물 · 1150 · 유럽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되찾은 통로
코르도바의 법관이자 의사이자 철학자. 그의 주석 덕에 유럽이 잊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읽었다.
【그때 그 자리】 12세기 코르도바다. 이슬람 치하 이베리아의 학문이 절정에 있었다.
법관 집안에서 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코르도바의 대법관이었다.
그 자신도 법관이자 의사였다. 궁정 주치의로 일했다.
라틴어권에서 「아베로에스」라 불렸다.
【왜 그렇게 됐나】 칼리프 아부 야쿠브 유수프가 그를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렵다며 풀어 달라 했다.
그 뒤 평생 주석을 썼다. 「소주석」·「중주석」·「대주석」 세 층으로 거의 전 저작을 다뤘다.
그래서 그냥 「주석가(The Commentator)」라 불린다. 단테가 「신곡」에서 그를 그렇게 부른다 — 지옥의 첫 고리, 세례받지 못한 현자들 사이에 두었다.
【어떻게 흘렀나】 앞서 가잘리가 「철학자들의 모순」을 써서 철학이 신앙을 해친다고 논박했다.
이븐 루시드가 「모순의 모순」으로 답했다.
핵심 주장은 이렇다 — 계시와 이성은 같은 진리에 이르는 두 길이며, 서로 어긋나 보이면 경전을 비유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마다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므로, 대중에게는 문자 그대로 가르치고 훈련된 사람은 논증으로 나아가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이슬람 세계에서는 밀렸다. 말년에 유배됐고 책이 불태워졌다. 그 뒤 아랍 철학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대신 다른 곳에서 살아남았다.
그의 주석이 히브리어와 라틴어로 번역돼 파리와 볼로냐 대학으로 들어갔다.
13세기 유럽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것을 되찾은 것이 이 주석을 통해서다.
충격이 컸다. 1210년과 1277년 파리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강의가 금지되기도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와 논쟁하며 「신학대전」을 썼다. 반박하려고 읽는 과정에서 스콜라 철학이 만들어졌다.
【남은 것】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터번을 쓴 인물이 하나 있다. 그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유럽 대학이라는 제도, 이성으로 신앙을 따지는 방식, 그 뒤의 세속 사상 — 그 계보를 거슬러 가면 코르도바의 법관이 나온다.
자기 문명에서 밀려난 사람이 남의 문명을 바꿨다.
지도에서 보기: 11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수리야바르만 2세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자야바르만 7세 살라흐 앗딘 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