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흐 앗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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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봉건 유럽과 십자군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한반도

무신정권

무신들이 정권을 잡은 100년. 그사이 몽골이 여섯 차례 침입했고 강화도로 천도해 항전했다.

전쟁 3건

무신정권의 성립1170 – 1270
고려 무신 vs 문신

문신이 무신을 천대하는 관행이 쌓였다. 의종의 보현원 행차에서 폭발했다.

보현원의 변 1170김보당의 난 1173삼별초 항쟁 1270

결과정중부·경대승·이의민을 거쳐 최씨 정권이 60년을 이었다. 몽골 침입에 강화도로 옮겨 항전했고,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까지 물러나며 끝까지 싸웠다.

100년 · 무인의 시대
겐페이 전쟁1180 – 1185
다이라 vs 미나모토

다이라 가문이 조정을 독점하자 미나모토가 각지에서 거병했다.

구리카라 고개 1183이치노타니 1184단노우라 1185

결과단노우라 해전에서 다이라가 멸문하고 여덟 살 천황이 바다에 잠겼다.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가마쿠라에 막부를 열어 700년 무가 정치가 시작된다.

5년 · 무가 정치의 개막
하틴 전투1187
아이유브 (살라흐 앗딘) vs 예루살렘 왕국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한 살라흐 앗딘에게 십자군 국가는 포위된 형세였다. 휴전을 깬 약탈이 빌미가 됐다.

하틴 1187예루살렘 항복 1187

결과예루살렘이 다시 무슬림 손에 넘어갔다.

이틀 · 십자군 야전군이 사실상 소멸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7명

살라흐 앗딘장군1187 · 아이유브 술탄
1137 – 1193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하고 하틴에서 십자군을 꺾었다.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
  • 하틴에서 십자군 격파
  • 예루살렘 탈환 1187
주희사상1190 · 성리학을 집대성해 동아시아 700년의 정통을 만든 학자
1130 – 1200

사서에 주석을 달고 이(理)와 기(氣)로 세계를 설명했다. 그의 학문이 조선의 국교가 됐다.

  • 「사서집주」
  • 이기론·격물치지
  • 백록동 서원 재건, 「주자가례」
리처드 1세장군1191 · 살라딘과 겨룬 「사자심왕」
1157 – 1199, 재위 1189 – 1199

재위 10년 중 영국에 머문 것은 반년. 십자군에서 살라딘과 싸우고 돌아오다 붙잡혀 거액의 몸값이 치러졌다.

  • 제3차 십자군, 아르수프 승리(1191)
  • 살라딘과 휴전, 성지 순례 보장
  • 오스트리아에 억류, 몸값 15만 마르크
자야바르만 7세정치1181 · 얼굴 216개를 새긴 왕
1122 무렵 – 1218 무렵

참파에 짓밟힌 뒤 나라를 되찾고 불교로 방향을 틀었다. 비문에 병원 102곳과 여관 121곳을 지었다고 적었다.

  • 앙코르 톰과 바이욘
  • 탑마다 새긴 얼굴 216개
  • 병원 102곳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정치1180 · 이탈리아와 교황에 맞선 「붉은 수염」 황제
1122 무렵 – 1190, 재위 1155 – 1190

황제권을 세우려 이탈리아 원정을 여섯 번 했고, 십자군 원정 도중 강에서 익사했다. 산속에서 잠자며 독일을 기다린다는 전설이 됐다.

  • 이탈리아 원정 6회, 레냐노 패배(1176)
  • 사자공 하인리히 제압
  • 제3차 십자군 중 살레프강에서 익사
피보나치과학1202 · 수학자
1170 무렵 – 1250 무렵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소개하다

  • 계산의 책 저술 1202
  • 피보나치 수열
  • 인도-아라비아 숫자 체계 전파
칭기즈 칸장군1206 · 몽골 대칸
1162 – 1227

흩어진 초원 부족을 하나로 묶었다. 그가 시작한 정복은 73년간 이어진다.

  • 초원 부족을 통일 1206
  • 호라즘 정벌로 서방 진출
  • 역참제와 몽골 문자

그 무렵의 사건

1180
베냉 왕국
오늘날 나이지리아 남부에 있던 베냉 왕국은 정교한 청동 조각과 궁정 예술로 이름 높았으나, 1897년 영국의 무력 원정으로 왕궁이 약탈당하고 멸망했다.
12세기 무렵 세워진 이 왕국은 오바(왕)를 중심으로 고도로 조직된 궁정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특히 왕실 조상과 역대 오바를 기리는 정교한 청동·상아 조각('베냉 브론즈')으로 유명했다. 1897년 영국은 무역 분쟁을 구실로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 왕궁을 불태우고 수천 점의 청동 조각을 약탈해 유럽 박물관으로 실어갔다. 이 유물들은 오늘날까지도 나이지리아 반환 요구와 유럽 박물관들의 소장 문제를 둘러싼 국제적 논쟁의 중심에 있다.
1200
라파누이의 석상
섬 하나에 900개를 세우고 나무를 다 썼다.
폴리네시아인이 태평양 한복판의 작은 섬에 닿아 거대한 석상 900개를 세웠다. 옮기는 데 나무가 필요했고, 숲이 사라지자 배를 만들 수 없어 나갈 수도 없게 됐다. 스스로 자원을 다 쓴 사례로 오래 인용됐는데, 쥐와 유럽인이 옮긴 병의 몫이 더 컸다는 반론도 있다.
1206
칭기즈 칸 즉위
흩어진 초원 부족이 하나의 이름 아래 묶였다.
흩어진 초원이 하나가 됐다. 73년에 걸친 정복이 여기서 시작된다.
1215
마그나 카르타
귀족들이 왕에게 법의 제약을 문서로 받아냈다.
왕도 법 아래 있다는 원칙이 문서로 남았다. 입헌주의의 씨앗이 된다.
1215
마그나카르타
1215년 잉글랜드의 존 왕이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해 왕권을 제한하는 대헌장에 서명했다.
왕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원칙을 문서로 못박은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당시에는 귀족의 특권을 지키려는 문서에 가까웠지만, 후대에 재해석되며 입헌주의와 법치주의의 상징이 됐다.
1150
앙코르 문명
저수지와 수로로 백만 명을 먹인 동남아시아 최대의 도시 문명이었다.
802년 자야바르만 2세가 스스로를 「전 우주의 지배자」로 선포하며 시작됐다. 거대한 저수지(바라이)와 수로망으로 논에 물을 대 인구를 지탱했다 — 최근 레이더 측량으로 앙코르와트 주변에 근대 이전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2세기 수리야바르만 2세가 힌두 사원으로 앙코르와트를 세웠고, 훗날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다. 왜 무너졌는지는 여러 설이 겹친다 — 수리 시설 과부하설, 아유타야와의 거듭된 전쟁설, 상좌부 불교로 옮아가며 신왕 이념이 힘을 잃었다는 설, 나이테 연구로 밝혀진 극단적 가뭄과 폭우의 반복이라는 기후설이 나란히 있다. 1431년 아유타야에 함락된 뒤 도읍을 남쪽으로 옮겼지만, 앙코르와트 자체는 승려들이 계속 관리해 완전히 버려진 적은 없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살라흐 앗딘

인물 · 1187 · 아이유브 술탄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하고 하틴에서 십자군을 꺾었다.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그때 그 자리】

12세기 이슬람 세계는 갈라져 있었다.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는 이름뿐이었고, 이집트는 시아파 파티마 왕조가, 시리아는 순니파 장기 가문이 다스렸다. 서로 다른 종파로 나뉜 이 분열이 십자군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다.

1099년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90년이 지나 있었다. 십자군 국가 넷이 지중해 동안에 자리 잡았다.

【왜 그렇게 됐나】

살라흐 앗딘은 지금의 이라크 티크리트에서 쿠르드족으로 났다. 아랍인도 튀르크인도 아닌 변방 출신이다.

삼촌을 따라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가 그곳에서 재상이 됐다. 1171년 파티마 왕조를 끝내고 이집트를 순니로 돌렸다. 1174년 시리아까지 아울렀다.

핵심은 여기다. 그는 십자군을 치기 전에 무슬림 세력을 먼저 하나로 묶는 데 12년을 썼다. 같은 편끼리 싸우던 상태로는 이길 수 없다고 봤다.

【어떻게 흘렀나】

1187년 7월 하틴에서 십자군 주력을 유인해 물 없는 고지에 가두었다. 갈증에 지친 기사단이 무너졌다.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 대부분이 하루에 사라졌다.

10월 예루살렘이 항복했다. 88년 전 십자군이 들어와 사흘간 학살한 그 도시다.

살라흐 앗딘은 학살하지 않았다. 몸값을 정해 지불한 사람을 풀어줬고, 못 내는 가난한 이들 상당수를 자기 돈으로 풀어줬다. 동생 알아딜이 1천 명을 달라 해서 풀어주고, 총대주교도 자기 몫으로 풀어줬다. 교회는 파괴되지 않았고 성묘교회는 기독교인에게 남겼다.

이 대비가 유럽에 그대로 전해졌다. 적의 기록이 그를 칭송한 드문 경우다.

1189년 3차 십자군이 왔다. 사자심왕 리처드와 2년을 싸웠다. 리처드가 병들자 살라흐 앗딘이 얼음과 과일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192년 협정이 맺어져 예루살렘은 무슬림이 갖되 기독교 순례는 자유롭게 허용하기로 했다.

1193년 다마스쿠스에서 죽었다. 재산이 거의 없어 장례비를 빌려야 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1917년까지 이슬람 지배 아래 있었다.

【남은 것】

그는 유럽 문학에서 이상적인 기사로 그려졌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에 두면서도 벌받지 않는 고결한 이교도의 자리에 놓았다. 월터 스콧의 소설이 이 이미지를 굳혔다.

20세기 아랍 민족주의는 그를 통합의 상징으로 불렀다. 쿠르드족은 쿠르드의 영웅으로 부른다. 같은 사람을 여러 편이 각자의 근거로 삼는다.

관용이 약함이 아니라 힘의 표현일 수 있다는 사례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인물이다. 다만 그도 전쟁 중에 포로를 처형한 기록이 있다. 성인으로만 그리는 것은 그를 다시 한번 이야기의 재료로 쓰는 일이다.

지도에서 보기: 11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주희 리처드 1세 자야바르만 7세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피보나치 칭기즈 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