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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전선이 유럽·아시아·아프리카·태평양에 동시에 걸쳤다. 전쟁이 끝나면서 식민제국들도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다.
국권을 잃고 35년. 3·1운동과 임시정부,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이 이어졌다.
왜선거로 선 공화정부에 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결과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랑코를, 소련은 공화국을 도왔고 세계 각지에서 의용군이 모였다. 다음 전쟁의 예행이었다. 게르니카를 폭격기가 지운 날, 도시 폭격이 무엇인지 세상이 알았다.
왜만주를 이미 차지한 일본이 화북으로 밀고 들어갔다. 루거우차오의 우발적 총격이 전면전의 방아쇠가 됐다.
결과일본이 중국 본토로 밀고 들어갔다.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다.
왜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원한과 대공황이 나치를 키웠다. 거듭된 유화 정책이 폴란드 침공에서 한계에 닿았다.
결과6천만 명이 죽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식민제국들도 함께 무너졌다.
왜일본의 중국 침략에 미국이 석유 금수로 대응했다. 자원 봉쇄를 뚫으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다.
결과일본이 미국과 태평양 전역에서 싸웠다. 조선의 해방이 여기서 결정됐다.
대공황을 뉴딜로 넘기고 전쟁으로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만주 명동촌에서 나 일본에서 옥사했다. 스물일곱이었다. 시집은 죽은 뒤에 나왔다.
프랑스가 무너진 뒤에도 항복을 거부했다. 라디오 연설로 국민을 버티게 했다.
최초의 원자로를 가동하다
숙청으로 권력을 굳히고 독소전쟁을 이겼다. 전후 동유럽을 진영에 편입시켰다.
봄브라는 장치로 독일군 암호를 풀어냈다. 컴퓨터 이론의 기초를 놓았지만 박해 속에 세상을 떠났다.
1936년 공화정부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켜 3년간의 내전 끝에 승리했다. 1975년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권위주의 체제로 통치했다.
빈의 낙방 화가에서 독일 총통이 됐다.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으며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다.
1944년 6월 6일 「출발」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으로는 한국전쟁을 끝내고 고속도로를 깔았으며 「군산복합체」를 경고했다.
파리에서 요리사로, 뉴욕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30년을 밖에서 지냈다. 1945년 독립선언문 첫머리에 미국 독립선언을 인용했다.
프로그램을 메모리에 저장하는 구조를 제시해 현대 컴퓨터의 틀을 잡았다.
일본 항복 이틀 뒤 자카르타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4년의 무력·외교전 끝에 네덜란드의 승인을 받아냈으나, 1965년 이후 수하르토에게 밀려났다.
그의 이름으로 중국과 태평양의 전쟁이 벌어졌다. 원폭 뒤 항복을 방송했고, 전범 재판을 피해 「상징」으로 남아 1989년까지 재위했다.
루스벨트가 급사해 82일 만에 대통령이 됐고 원폭 사용을 결정했다. 마셜 플랜과 나토, 한국전쟁 참전으로 냉전의 틀을 짰다.
북벌로 중국을 통일했으나 일본과 공산당 사이에서 싸우다 1949년 대륙을 잃었다. 타이완에서 계엄으로 26년을 다스렸다.
「아비뇽의 처녀들」로 회화를 깨뜨렸고 「게르니카」로 폭격의 참상을 고발했다. 91년 동안 5만 점을 만들었다.
로스앨러모스에서 3년 만에 폭탄을 만들었고, 첫 폭발을 보며 「나는 죽음이 되었다」를 떠올렸다. 수소폭탄에 반대하다 보안 청문회로 몰락했다.
노동자 계층의 폭넓은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올라 산업화와 사회복지 확대를 추진했다. 부인 에바 페론('에비타')과 함께 포퓰리즘 정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무솔리니의 침공에 맞서 제네바에서 「오늘은 우리, 내일은 당신들」이라 경고했다. 44년을 다스렸고 라스타파리는 그를 신으로 섬긴다.
불황엔 정부가 돈을 써야 한다. 그의 「일반이론」은 전후 30년 서방 경제정책의 교과서였고 브레턴우즈 체제를 설계했다.
일본 점령기와 그 이후 영국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47년 영국과 독립 협정을 맺어냈으나, 같은 해 정적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돼 독립(1948)을 직접 보지 못했다.
「자정의 종이 울릴 때 인도는 자유로 깨어난다」. 17년간 총리로 세속주의·사회주의·비동맹의 인도를 세웠다.
힌두-무슬림 통합의 대사였던 변호사가 두 민족론으로 돌아섰다. 파키스탄 건국 1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정보이론을 세우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장기 집권을 시도하다 4·19혁명으로 하야했다.
파르티잔으로 나치를 몰아내고 소련 진영에서 이탈했다. 비동맹 운동을 이끌고 여섯 민족을 하나로 묶었으나 그가 죽자 나라도 갈라졌다.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독립을 선언했고, 다음 날 아랍 5개국의 공격을 막아 냈다. 사막 키부츠에서 여생을 보냈다.
국공내전에서 이기고 톈안먼에서 건국을 선포했다.
인천에 상륙해 전세를 뒤집었다. 이후 확전 문제로 해임됐다.
스물넷에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 한 번으로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했다.
불가촉천민으로 나 미국과 영국에서 박사가 됐다. 독립 인도의 헌법 초안을 썼고 카스트에 의한 차별을 금지 조항으로 넣었다. 간디와 이 문제로 정면으로 부딪쳤다.
1902년 리야드를 탈환한 것을 시작으로 30년에 걸쳐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부족과 도시국가를 정복·통합했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초대 국왕이 됐다.
만주 항일 유격대 출신으로 소련의 후원 아래 정권을 세웠다. 남침으로 300만이 죽는 전쟁을 일으켰고 3대 세습 체제의 시조가 됐다.
소금 행진으로 비폭력 불복종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51번 사진을 찍은 사람
군 출신으로 쿠데타에 준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잡은 뒤, 개인숭배와 비밀경찰을 앞세운 폭압적 통치를 이어갔다. 아이티계 주민 수천~수만 명을 학살한 1937년 '파슬리 학살'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은하가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관측으로 밝혀 팽창 우주를 증명했다.
DNA 이중나선을 밝히다
생명의 중심원리를 제시하다
우연히 자란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26년간 총리로 마오의 그늘에서 나라를 굴렸다. 제네바와 반둥에서 신중국을 세계에 소개했고 닉슨을 맞았으며 문화대혁명의 피해를 줄이려 애썼다.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원리를 내놨다.
3·1 운동 33인 가운데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몇 사람 중 하나다. 님의 침묵에서 님은 잃은 나라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다.
전자를 파동으로 다루는 방정식을 세우고, 양자역학의 역설을 고양이 사고실험으로 짚었다.
1952년 군주정을 무너뜨린 자유장교단의 일원으로 권력을 잡았다. 1956년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았지만 외교적으로 승리하며 아랍 세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제20차 당대회 비밀 연설로 스탈린 숭배를 깼다. 스푸트니크를 쏘고 유엔에서 구두를 두드렸으며 쿠바 위기 뒤 실각했다.
영국령 골드코스트를 이끌어 가나로 독립시켰다. 범아프리카주의를 내걸었으나 1966년 외유 중 쿠데타로 쫓겨났다.
1958년 프랑스가 옛 아프리카 식민지들에 제안한 '프랑스 공동체' 잔류 국민투표에서, 기니만이 유일하게 거부표를 던지도록 이끌어 즉각 완전 독립을 얻어냈다. 이후 26년간 권위주의적으로 기니를 통치했다.
1940년 「프랑스는 전투에서 졌지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다」라고 방송했다. 알제리 전쟁의 혼란 속에 돌아와 대통령제 헌법을 만들었다.
바티스타 독재를 게릴라전으로 무너뜨리고 쿠바를 사회주의 국가로 선언했다. 미국의 코앞에서 반세기 가까이 권좌를 지켰다.
제1차 세계대전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으로 명성을 얻은 뒤, 튀르크 독립전쟁을 이끌어 그리스와 연합국의 분할 시도를 막아냈다. 1923년 술탄정을 폐지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워 초대 대통령이 됐다.
오토바이로 남미를 돌다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을 이끌었다. 장관직을 버리고 볼리비아 밀림에서 게릴라로 싸우다 처형됐다.
1959년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했다. 비폭력으로 티베트 자치를 호소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세계의 종교 지도자가 됐다.
「로마 진군」으로 권력을 잡은 첫 파시스트 독재자. 히틀러의 본보기이자 나중엔 그의 꼭두각시가 됐고, 파르티잔에게 처형돼 거꾸로 매달렸다.
탕가니카(오늘날 탄자니아 본토) 독립을 이끌고 잔지바르와의 통합으로 탄자니아를 세운 초대 대통령. '우자마(공동체 정신)'를 내세운 독자적 아프리카 사회주의 노선으로 농촌 집단화를 추진했으나 경제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108분의 비행 뒤 「지구는 푸르다」고 말했고 세계의 영웅이 됐다.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독립군 최대의 승리를 거뒀다. 이후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이어가다 암살당했다.
포수 출신으로 대한독립군을 조직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훗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43세의 최연소 당선. 「국가가 무엇을 해 줄지 묻지 말고」로 시작했고, 달 착륙을 약속했으며, 댈러스에서 총에 맞았다.
열일곱에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이끌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졌다.
3·1운동 뒤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광복군을 조직했다.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고도성장을 이끌었으나, 유신헌법으로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가 부하의 총에 살해당했다.
버스 보이콧에서 워싱턴 행진까지 비폭력으로 인종 분리를 무너뜨렸다. 39세에 멤피스에서 암살됐다.
민족자결을 말해 3·1운동에 불을 붙였다. 국제연맹을 만들었으나 정작 미국 상원이 가입을 거부했다.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영국으로부터 잠비아의 독립을 이끌어내 1964년 초대 대통령이 됐다. 27년간 집권하며 '인간주의'를 내세운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했으나, 구리 가격 하락에 따른 경제난 속에 1991년 선거에서 패배해 평화적으로 물러났다.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다.
그림으로 양자를 계산하다
콩고 위기의 혼란 속에서 쿠데타로 권력을 잡아 나라 이름을 자이르로 바꾸는 등 32년간 개인 숭배에 가까운 독재를 펼쳤다. 냉전기 반공 노선 덕에 서방의 묵인을 받으며 막대한 부를 국외로 빼돌렸다.
말레이시아에서 쫓겨난 작은 섬을 31년간 이끌어 1인당 소득을 영국보다 높였다. 청렴하되 권위적인 「아시아적 가치」의 모델이 됐다.
네루의 딸로 1966년 총리에 올라 총 15년을 통치했다. 1975~77년 비상사태를 선포해 반대파를 탄압했고, 1984년 시크교 사원 무력 진압에 대한 보복으로 자신의 경호원에게 암살당했다.
독립운동을 이끌어 1966년 말라위 초대 대통령이 된 뒤, 종신 대통령을 자처하며 30년 가까이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했다.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심했지만, 1990년대 국내외 민주화 압력에 밀려 다당제를 도입하고 선거에서 패배해 물러났다.
해당 없음
인물 · 1941 · 부끄러움을 아는 일
만주 명동촌에서 나 일본에서 옥사했다. 스물일곱이었다. 시집은 죽은 뒤에 나왔다.
【그때 그 자리】 1917년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났다. 할아버지 대에 함경도에서 옮겨 간 이주민 마을이다.
명동학교에서 배웠다. 고종사촌 송몽규가 함께 자랐다 — 평생 나란히 가다 나란히 죽는다.
1938년 연희전문 문과에 들어갔다. 1941년 졸업하며 시 19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스승 이양하가 만류했다. 시국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됐나】 1942년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면 창씨개명이 필요했다.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로 이름을 바꿨다.
그 닷새 전에 쓴 시가 「참회록」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 이다지도 욕될까.」
총을 들지 않았고 조직에 들지도 않았다. 그가 한 것은 부끄러워하는 일이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어떻게 흘렀나】 1943년 7월 교토에서 송몽규와 함께 체포됐다.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 독립운동을 모의했다는 것이다.
재판 기록에 「조선 민족의 문화를 유지하고 민족의식을 앙양하려 했다」고 적혀 있다. 시를 쓰는 것이 죄가 됐다.
1944년 징역 2년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그래서】 1945년 2월 16일 옥에서 죽었다. 스물일곱이었다. 광복 여섯 달 전이다.
매일 정체 모를 주사를 맞았다는 증언이 있다. 규슈제국대학의 생체실험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됐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송몽규도 20일 뒤 같은 곳에서 죽었다.
【남은 것】 살아서는 시집 한 권을 내지 못했다. 1948년 친구 정병욱이 숨겨 둔 원고로 유고 시집이 나왔다. 정병욱의 어머니가 광양의 집 마루 밑에 항아리에 넣어 묻어 두었던 것이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이 이 시인의 자리다. 크게 싸우지 못한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한 사람의 글이, 크게 싸운 사람들의 기록만큼 오래 읽힌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대신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