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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전선이 유럽·아시아·아프리카·태평양에 동시에 걸쳤다. 전쟁이 끝나면서 식민제국들도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다.
국권을 잃고 35년. 3·1운동과 임시정부,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이 이어졌다.
왜만주를 이미 차지한 일본이 화북으로 밀고 들어갔다. 루거우차오의 우발적 총격이 전면전의 방아쇠가 됐다.
결과일본이 중국 본토로 밀고 들어갔다.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다.
왜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원한과 대공황이 나치를 키웠다. 거듭된 유화 정책이 폴란드 침공에서 한계에 닿았다.
결과6천만 명이 죽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식민제국들도 함께 무너졌다.
왜일본의 중국 침략에 미국이 석유 금수로 대응했다. 자원 봉쇄를 뚫으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다.
결과일본이 미국과 태평양 전역에서 싸웠다. 조선의 해방이 여기서 결정됐다.
왜항일전이 끝나자 미국의 중재도 소용없이 두 당이 만주부터 충돌했다. 국민당은 병력과 무기가 우세했으나 인플레이션과 부패로 민심을 잃었다.
결과린뱌오가 만주를 석권하고 화이하이에서 국민당 55만이 궤멸됐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서고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옮겼다. 양안 분단은 지금도 이어진다.
왜일본 항복 뒤 호찌민이 독립을 선언했으나 프랑스가 식민지 회복을 위해 돌아왔다.
결과8년 게릴라전 끝에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이 항복했다. 제네바에서 베트남은 17도선으로 갈렸고, 미국이 프랑스의 자리를 이어받아 베트남전쟁이 된다.
숙청으로 권력을 굳히고 독소전쟁을 이겼다. 전후 동유럽을 진영에 편입시켰다.
봄브라는 장치로 독일군 암호를 풀어냈다. 컴퓨터 이론의 기초를 놓았지만 박해 속에 세상을 떠났다.
최초의 원자로를 가동하다
1944년 6월 6일 「출발」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으로는 한국전쟁을 끝내고 고속도로를 깔았으며 「군산복합체」를 경고했다.
대공황을 뉴딜로 넘기고 전쟁으로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만주 명동촌에서 나 일본에서 옥사했다. 스물일곱이었다. 시집은 죽은 뒤에 나왔다.
파리에서 요리사로, 뉴욕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30년을 밖에서 지냈다. 1945년 독립선언문 첫머리에 미국 독립선언을 인용했다.
프로그램을 메모리에 저장하는 구조를 제시해 현대 컴퓨터의 틀을 잡았다.
일본 항복 이틀 뒤 자카르타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4년의 무력·외교전 끝에 네덜란드의 승인을 받아냈으나, 1965년 이후 수하르토에게 밀려났다.
그의 이름으로 중국과 태평양의 전쟁이 벌어졌다. 원폭 뒤 항복을 방송했고, 전범 재판을 피해 「상징」으로 남아 1989년까지 재위했다.
루스벨트가 급사해 82일 만에 대통령이 됐고 원폭 사용을 결정했다. 마셜 플랜과 나토, 한국전쟁 참전으로 냉전의 틀을 짰다.
로스앨러모스에서 3년 만에 폭탄을 만들었고, 첫 폭발을 보며 「나는 죽음이 되었다」를 떠올렸다. 수소폭탄에 반대하다 보안 청문회로 몰락했다.
프랑스가 무너진 뒤에도 항복을 거부했다. 라디오 연설로 국민을 버티게 했다.
노동자 계층의 폭넓은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올라 산업화와 사회복지 확대를 추진했다. 부인 에바 페론('에비타')과 함께 포퓰리즘 정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1936년 공화정부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켜 3년간의 내전 끝에 승리했다. 1975년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권위주의 체제로 통치했다.
일본 점령기와 그 이후 영국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47년 영국과 독립 협정을 맺어냈으나, 같은 해 정적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돼 독립(1948)을 직접 보지 못했다.
빈의 낙방 화가에서 독일 총통이 됐다.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으며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다.
「자정의 종이 울릴 때 인도는 자유로 깨어난다」. 17년간 총리로 세속주의·사회주의·비동맹의 인도를 세웠다.
힌두-무슬림 통합의 대사였던 변호사가 두 민족론으로 돌아섰다. 파키스탄 건국 1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정보이론을 세우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장기 집권을 시도하다 4·19혁명으로 하야했다.
파르티잔으로 나치를 몰아내고 소련 진영에서 이탈했다. 비동맹 운동을 이끌고 여섯 민족을 하나로 묶었으나 그가 죽자 나라도 갈라졌다.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독립을 선언했고, 다음 날 아랍 5개국의 공격을 막아 냈다. 사막 키부츠에서 여생을 보냈다.
국공내전에서 이기고 톈안먼에서 건국을 선포했다.
북벌로 중국을 통일했으나 일본과 공산당 사이에서 싸우다 1949년 대륙을 잃었다. 타이완에서 계엄으로 26년을 다스렸다.
「아비뇽의 처녀들」로 회화를 깨뜨렸고 「게르니카」로 폭격의 참상을 고발했다. 91년 동안 5만 점을 만들었다.
인천에 상륙해 전세를 뒤집었다. 이후 확전 문제로 해임됐다.
불가촉천민으로 나 미국과 영국에서 박사가 됐다. 독립 인도의 헌법 초안을 썼고 카스트에 의한 차별을 금지 조항으로 넣었다. 간디와 이 문제로 정면으로 부딪쳤다.
만주 항일 유격대 출신으로 소련의 후원 아래 정권을 세웠다. 남침으로 300만이 죽는 전쟁을 일으켰고 3대 세습 체제의 시조가 됐다.
무솔리니의 침공에 맞서 제네바에서 「오늘은 우리, 내일은 당신들」이라 경고했다. 44년을 다스렸고 라스타파리는 그를 신으로 섬긴다.
불황엔 정부가 돈을 써야 한다. 그의 「일반이론」은 전후 30년 서방 경제정책의 교과서였고 브레턴우즈 체제를 설계했다.
51번 사진을 찍은 사람
DNA 이중나선을 밝히다
생명의 중심원리를 제시하다
스물넷에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 한 번으로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했다.
1902년 리야드를 탈환한 것을 시작으로 30년에 걸쳐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부족과 도시국가를 정복·통합했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초대 국왕이 됐다.
26년간 총리로 마오의 그늘에서 나라를 굴렸다. 제네바와 반둥에서 신중국을 세계에 소개했고 닉슨을 맞았으며 문화대혁명의 피해를 줄이려 애썼다.
소금 행진으로 비폭력 불복종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1952년 군주정을 무너뜨린 자유장교단의 일원으로 권력을 잡았다. 1956년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았지만 외교적으로 승리하며 아랍 세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군 출신으로 쿠데타에 준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잡은 뒤, 개인숭배와 비밀경찰을 앞세운 폭압적 통치를 이어갔다. 아이티계 주민 수천~수만 명을 학살한 1937년 '파슬리 학살'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제20차 당대회 비밀 연설로 스탈린 숭배를 깼다. 스푸트니크를 쏘고 유엔에서 구두를 두드렸으며 쿠바 위기 뒤 실각했다.
은하가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관측으로 밝혀 팽창 우주를 증명했다.
영국령 골드코스트를 이끌어 가나로 독립시켰다. 범아프리카주의를 내걸었으나 1966년 외유 중 쿠데타로 쫓겨났다.
우연히 자란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1958년 프랑스가 옛 아프리카 식민지들에 제안한 '프랑스 공동체' 잔류 국민투표에서, 기니만이 유일하게 거부표를 던지도록 이끌어 즉각 완전 독립을 얻어냈다. 이후 26년간 권위주의적으로 기니를 통치했다.
1940년 「프랑스는 전투에서 졌지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다」라고 방송했다. 알제리 전쟁의 혼란 속에 돌아와 대통령제 헌법을 만들었다.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원리를 내놨다.
바티스타 독재를 게릴라전으로 무너뜨리고 쿠바를 사회주의 국가로 선언했다. 미국의 코앞에서 반세기 가까이 권좌를 지켰다.
오토바이로 남미를 돌다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을 이끌었다. 장관직을 버리고 볼리비아 밀림에서 게릴라로 싸우다 처형됐다.
1959년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했다. 비폭력으로 티베트 자치를 호소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세계의 종교 지도자가 됐다.
3·1 운동 33인 가운데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몇 사람 중 하나다. 님의 침묵에서 님은 잃은 나라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다.
전자를 파동으로 다루는 방정식을 세우고, 양자역학의 역설을 고양이 사고실험으로 짚었다.
탕가니카(오늘날 탄자니아 본토) 독립을 이끌고 잔지바르와의 통합으로 탄자니아를 세운 초대 대통령. '우자마(공동체 정신)'를 내세운 독자적 아프리카 사회주의 노선으로 농촌 집단화를 추진했으나 경제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108분의 비행 뒤 「지구는 푸르다」고 말했고 세계의 영웅이 됐다.
43세의 최연소 당선. 「국가가 무엇을 해 줄지 묻지 말고」로 시작했고, 달 착륙을 약속했으며, 댈러스에서 총에 맞았다.
제1차 세계대전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으로 명성을 얻은 뒤, 튀르크 독립전쟁을 이끌어 그리스와 연합국의 분할 시도를 막아냈다. 1923년 술탄정을 폐지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워 초대 대통령이 됐다.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고도성장을 이끌었으나, 유신헌법으로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가 부하의 총에 살해당했다.
버스 보이콧에서 워싱턴 행진까지 비폭력으로 인종 분리를 무너뜨렸다. 39세에 멤피스에서 암살됐다.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영국으로부터 잠비아의 독립을 이끌어내 1964년 초대 대통령이 됐다. 27년간 집권하며 '인간주의'를 내세운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했으나, 구리 가격 하락에 따른 경제난 속에 1991년 선거에서 패배해 평화적으로 물러났다.
「로마 진군」으로 권력을 잡은 첫 파시스트 독재자. 히틀러의 본보기이자 나중엔 그의 꼭두각시가 됐고, 파르티잔에게 처형돼 거꾸로 매달렸다.
그림으로 양자를 계산하다
콩고 위기의 혼란 속에서 쿠데타로 권력을 잡아 나라 이름을 자이르로 바꾸는 등 32년간 개인 숭배에 가까운 독재를 펼쳤다. 냉전기 반공 노선 덕에 서방의 묵인을 받으며 막대한 부를 국외로 빼돌렸다.
말레이시아에서 쫓겨난 작은 섬을 31년간 이끌어 1인당 소득을 영국보다 높였다. 청렴하되 권위적인 「아시아적 가치」의 모델이 됐다.
네루의 딸로 1966년 총리에 올라 총 15년을 통치했다. 1975~77년 비상사태를 선포해 반대파를 탄압했고, 1984년 시크교 사원 무력 진압에 대한 보복으로 자신의 경호원에게 암살당했다.
독립운동을 이끌어 1966년 말라위 초대 대통령이 된 뒤, 종신 대통령을 자처하며 30년 가까이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했다.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심했지만, 1990년대 국내외 민주화 압력에 밀려 다당제를 도입하고 선거에서 패배해 물러났다.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독립군 최대의 승리를 거뒀다. 이후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이어가다 암살당했다.
포수 출신으로 대한독립군을 조직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훗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열일곱에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이끌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졌다.
3·1운동 뒤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광복군을 조직했다.
민족자결을 말해 3·1운동에 불을 붙였다. 국제연맹을 만들었으나 정작 미국 상원이 가입을 거부했다.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다.
1969년 무혈 쿠데타로 왕정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뒤, 독자적인 '제3세계 이론'을 내세우며 42년간 리비아를 통치했다. 한때 여러 테러조직을 지원해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으나 2000년대 들어 서방과 관계를 개선하기도 했다.
1969년 7월 20일 「한 사람에게는 작은 걸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 6억 명이 TV로 지켜봤다.
해당 없음
인물 · 1943 · 나라를 세우고 나라 사람을 죽인 사람
숙청으로 권력을 굳히고 독소전쟁을 이겼다. 전후 동유럽을 진영에 편입시켰다.
【그때 그 자리】 조지아의 구두 수선공 아들로 태어났다. 신학교에 다니다 혁명 운동에 들어갔다.
본명은 이오시프 주가시빌리. 「스탈린」은 강철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지은 것이다.
레닌 아래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 서기장이라는 자리가 사무직으로 여겨졌는데, 그 자리에서 인사를 쥐었다.
【왜 그렇게 됐나】 1924년 레닌이 죽자 트로츠키와 겨뤘다. 트로츠키가 세계혁명을 주장할 때 그는 「일국 사회주의」를 내걸었다.
지친 나라에 「우선 우리부터 살자」는 말이 먹혔다.
【어떻게 흘렀나】 1928년부터 5개년 계획이다. 농업 국가를 10년 만에 공업 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100년 뒤졌다. 10년 안에 따라잡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짓밟힌다.」
실제로 공업 생산이 몇 배로 늘었다. 그 대가가 농업 집단화였다.
부농(쿨라크)을 계급으로 청산한다며 수백만을 시베리아로 보냈다. 곡물을 강제로 걷었다. 1932~33년 우크라이나에서 대기근이 났다 — 홀로도모르, 300만에서 500만이 굶어 죽었다.
1936년부터 대숙청이다. 당 간부와 군 장교와 지식인을 재판에 세워 처형했다. 붉은 군대 장군의 대부분이 이때 죽었다.
굴라크에 수백만이 갇혔다. 총 희생자 추정치는 자료에 따라 크게 갈리는데, 적게 잡아도 수백만이다.
【그래서】 1941년 독일이 쳐들어왔다. 장교단을 숙청한 대가로 초반에 크게 밀렸다.
그러나 공업화해 둔 것이 뒤에서 힘이 됐다. 우랄 너머로 공장을 통째로 옮겨 탱크를 찍어 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돌아섰고 베를린까지 갔다.
전쟁 뒤 동유럽을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 들어온 것도 그의 결정이다.
【남은 것】 1953년 죽었다. 3년 뒤 흐루쇼프가 그의 범죄를 폭로했다.
「그가 없었다면 나치를 이길 수 없었다」와 「그가 죽인 사람이 나치가 죽인 소련인만큼 많다」가 함께 있다. 러시아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 다시 올라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