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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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억 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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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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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조산운동

생물과 공룡

대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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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봉건 유럽과 십자군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한반도

고려 전기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전쟁 3건

바이킹 시대793 – 1066
노르드인 vs 유럽 각지

인구 압력과 흘수 얕은 롱십이 결합했다. 강을 거슬러 내륙까지 들이닥칠 수 있는 배가 결정적이었다.

린디스판 약탈 793파리 포위 885스탬퍼드 브리지 1066

결과약탈로 시작해 정착과 건국으로 끝났다. 노르망디·러시아·아이슬란드가 이들의 손에서 생겼고, 북아메리카에도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닿았다.

273년 · 유럽 지도를 다시 그렸다
노르만 정복1066
노르망디 vs 잉글랜드

참회왕 에드워드가 후사 없이 죽자 세 사람이 왕위를 주장했다.

스탬퍼드 브리지 1066헤이스팅스 1066

결과해럴드가 북쪽에서 노르웨이군을 꺾고 400km를 남하해 헤이스팅스에서 졌다. 잉글랜드의 지배층·언어·법이 통째로 바뀌었고, 영어에 프랑스어 어휘가 쏟아져 들어왔다.

하루의 전투가 나라를 바꿨다
만지케르트 전투1071
셀주크 vs 동로마

셀주크 튀르크가 아나톨리아로 밀고 들어오자 동로마 황제가 직접 군을 이끌고 나섰다.

만지케르트 1071

결과황제가 사로잡히고 아나톨리아를 잃었다. 이 패배가 십자군을 부르는 계기가 된다.

하루 · 황제 로마노스 4세가 포로가 됐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5명

왕안석정치1069 · 송을 뜯어고치려 한 재상
AD 1021 – AD 1086

재정난과 군사력 약화를 제도로 풀려 했다. 개혁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그가 물러나자 대부분 폐지됐다.

  • 청묘법 — 농민에게 낮은 이자로 빌려줌
  • 모역법·보갑법 등 신법 시행
  • 구법당과의 당쟁이 송을 갈랐다
정복왕 윌리엄장군1066 · 하루 만에 나라를 바꾼 사람
AD 1028 – AD 1087

노르망디 공의 사생아로 태어나 잉글랜드 왕이 됐다. 헤이스팅스 한 번의 전투가 잉글랜드의 지배층과 언어를 통째로 갈았다.

  • 헤이스팅스 전투 1066
  • 둠즈데이 북 — 전국 토지를 조사
  • 잉글랜드에 노르만 봉건제를 이식
소식예술1080 · 귀양지에서 더 좋은 글을 쓴 사람
AD 1037 – AD 1101

신법을 비판하다 여러 번 유배됐다. 시·산문·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황주 유배 시절의 「적벽부」가 대표작이다.

  • 「적벽부」 — 유배지에서 쓴 절정
  • 송대 문인화의 기틀
  • 동파육 — 유배지의 요리가 이름을 남김
심괄과학1088 · 송의 과학자
1031 – 1095

몽계필담을 쓴 박학한 관료

  • 몽계필담 저술
  • 자기 편각을 처음 기록
  • 활자 인쇄술 관련 기록을 남김
우르바노 2세사상1095 · 한 번의 연설로 200년을 움직인 교황
AD 1035 – AD 1099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성지 탈환을 호소했다.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외침이 군중에서 터져 나왔다고 전한다.

  • 클레르몽 연설 1095 — 십자군의 시작
  • 동서 교회 화해를 노렸으나 골만 깊어짐
  • 예루살렘 함락 소식을 듣지 못하고 사망

그 무렵의 사건

1077
카노사의 굴욕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눈 속에서 사흘을 맨발로 서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사죄했다.
주교를 누가 임명하느냐는 서임권 다툼에서 교황은 황제를 파문했고, 제후들이 황제를 버리려 하자 하인리히는 알프스를 넘어 카노사 성 앞에 섰다. 교황은 용서했지만 황제는 곧 힘을 회복해 로마로 쳐들어갔다. 이 사건은 교권이 왕권 위에 선 상징이자, 세속 권력과 교회가 갈라지는 서유럽 특유의 이중 구조를 굳힌 장면이다.
1054
동서 교회 분열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했다.
1,000년을 함께한 교회가 갈라졌다. 지금까지 봉합되지 않았다.
1050
카호키아
미시시피강 가에 인구 2만의 도시가 있었다.
북아메리카에 유럽인이 오기 전 가장 큰 도시였다. 밑변이 기자 대피라미드보다 넓은 흙 둔덕을 쌓았고, 나무 기둥을 원으로 세워 해를 관측했다. 13세기에 버려졌는데 이유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1107
윤관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국경을 위협하자, 윤관은 특수 부대 별무반을 창설해 이들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았다.
여진족과의 첫 전투에서 고려의 기존 군대가 기병 중심인 여진족에 고전하자, 윤관은 기병·보병·승병을 아우르는 특수 부대 별무반을 조직해 재정비했다. 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북방으로 몰아낸 뒤, 그 자리에 9개의 성(동북 9성)을 쌓아 새 영토로 편입했다(1107년). 그러나 이 지역을 지키는 데 드는 비용과 여진의 거센 반환 요구 등을 고려해, 고려는 몇 년 뒤 이 땅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철수했다.
1030
촐라 왕조의 해상 원정
11세기, 남인도의 촐라 왕조가 벵골만을 건너 동남아시아의 스리위자야 왕국까지 해군을 보내 정복했다.
라자라자 1세와 그 아들 라젠드라 1세 시절 촐라는 인도양 해상무역로를 장악하는 강력한 해군력을 갖췄다. 동남아까지 원정을 보낸 것은 고대 인도 왕조로서는 이례적인 규모였다.
1113
앙코르의 물길
사람이 판 저수지 하나가 길이 8킬로미터였다.
우기에 넘치고 건기에 마르는 땅을 저수지와 수로로 다스렸다. 1년에 두세 번 벼를 거뒀고 그 잉여가 사원을 지었다. 도시 면적이 1,000제곱킬로미터로 산업화 이전 세계 최대였다는 평가가 있다. 15세기에 가뭄과 폭우가 번갈아 오며 그 수로가 무너졌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왕안석

인물 · 1069 · 송을 고치려다 나라를 갈라놓은 개혁

재정난과 군사력 약화를 제도로 풀려 했다. 개혁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그가 물러나자 대부분 폐지됐다.

【그때 그 자리】 11세기 북송. 겉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안이 곪아 있었다.

관리가 너무 많았고(용관), 군대가 너무 많았으며(용병), 거란과 서하에 해마다 은과 비단을 보냈다(세폐). 재정이 만성 적자였다.

【왜 그렇게 됐나】 1069년 신종이 왕안석을 등용했다. 「신법」이다.

청묘법 — 봄에 나라가 농민에게 싼 이자로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받는다. 고리대를 막으려는 것이다.

시역법 — 나라가 물건을 사서 값이 오를 때 풀어 물가를 잡는다.

모역법 — 부역을 돈으로 대신 내게 하고 그 돈으로 사람을 고용한다. 관호와 사원도 내게 했다.

방전균세법 — 토지를 다시 측량해 숨긴 땅에도 세금을 매긴다.

보갑법 — 열 집을 한 단위로 묶어 자경과 병역을 맡긴다.

【어떻게 흘렀나】 재정이 좋아졌다. 그런데 반발이 거셌다.

사마광과 소식이 앞장섰다. 나라가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었다. 실무에서도 문제가 났다 — 청묘법의 이자가 지방에서 강제 할당으로 변질돼 오히려 농민을 괴롭혔다.

신법당과 구법당으로 갈렸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법을 뒤집었다.

1076년 왕안석이 물러났고, 1085년 신종이 죽자 사마광이 신법을 모두 폐지했다. 그러다 다시 신법당이 돌아와 구법당을 명단으로 만들어 탄압했다.

【그래서】 이 당쟁이 40년을 갔다. 그 끝에 1127년 금이 쳐들어와 황제 둘이 끌려간다(정강의 변).

북송이 망한 원인을 신법에서 찾는 견해와, 신법을 막은 쪽에서 찾는 견해가 오래 겨뤘다.

【남은 것】 20세기 들어 재평가됐다.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 빈부를 조절하려 한 시도로 읽힌 것이다.

「중국사에서 가장 이른 근대적 개혁」이라 부른 학자도 있고, 계획경제의 원형으로 본 이도 있다.

본인은 청렴했다. 옷을 갈아입지 않고 세수를 하지 않아 얼굴이 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집이 세서 「요불변(拗不變) — 꺾여도 변하지 않는다」는 별명이 붙었다.

지도에서 보기: 10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정복왕 윌리엄 소식 심괄 우르바노 2세 야로슬라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