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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해당 없음
신법을 비판하다 여러 번 유배됐다. 시·산문·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황주 유배 시절의 「적벽부」가 대표작이다.
몽계필담을 쓴 박학한 관료
재정난과 군사력 약화를 제도로 풀려 했다. 개혁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그가 물러나자 대부분 폐지됐다.
노르망디 공의 사생아로 태어나 잉글랜드 왕이 됐다. 헤이스팅스 한 번의 전투가 잉글랜드의 지배층과 언어를 통째로 갈았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성지 탈환을 호소했다.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외침이 군중에서 터져 나왔다고 전한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인물 · 1080 · 귀양 갈 때마다 시를 남긴 사람
신법을 비판하다 여러 번 유배됐다. 시·산문·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황주 유배 시절의 「적벽부」가 대표작이다.
【그때 그 자리】 북송의 문인이다. 호가 동파(東坡)라 소동파로 더 알려졌다.
1057년 스물둘에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다. 세 부자가 모두 당송팔대가에 든다.
【왜 그렇게 됐나】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했다. 이상은 옳으나 시행에서 백성을 해친다고 보았다.
1079년 시에 조정을 비방하는 뜻이 담겼다는 이유로 잡혔다. 오대시안(烏臺詩案)이다. 130일을 갇혔고 죽을 뻔했다.
황저우로 유배됐다. 관직은 있으나 일이 없는 자리였다.
【어떻게 흘렀나】 그곳 동쪽 비탈(東坡)의 황무지를 일궈 먹고살았다. 호가 거기서 나왔다.
가장 좋은 글이 그때 나왔다. 「적벽부」 두 편이 황저우에서 쓰였다.
「손님과 나는 강 위에 배를 띄웠다. (…) 강물은 이렇게 흘러가지만 아주 가 버린 적이 없고, 달은 차고 기울지만 끝내 줄지도 늘지도 않는다. 변한다는 쪽에서 보면 천지도 한순간이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쪽에서 보면 사물과 나는 모두 다함이 없다.」
돼지고기가 싸고 아무도 먹지 않는 것을 보고 조리법을 적었다. 「불을 약하게 하고 물을 적게 하여 오래 익히면 절로 맛있다.」 동파육이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자 돌아왔다가 또 밀려났다. 혜주로, 다시 하이난으로.
하이난은 당시 유배지 가운데 최악이었다. 「먹을 고기가 없고 병들어도 약이 없고 나가도 벗이 없다.」 그러면서도 그곳에 학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1101년 사면돼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남은 것】 시·사·산문·글씨·그림에 모두 능했다. 중국사에서 이만큼 여러 분야에 남긴 사람이 드물다.
항저우 태수 때 서호를 준설하고 그 흙으로 둑을 쌓았다. 지금도 소제(蘇堤)라 부른다.
그의 글이 오래 읽히는 것은 재주 때문만이 아니다. 세 번 유배되고도 원망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나무 지팡이에 짚신 신고 말보다 가볍게 간다. 누가 두려우랴, 도롱이 하나로 안개비 속에 평생을 보내리라.」
지도에서 보기: 10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심괄 왕안석 정복왕 윌리엄 우르바노 2세 수리야바르만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