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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그리스 각지에 도시국가가 섰다. 왕정이 귀족정으로, 다시 참주정과 민주정으로 갈라졌다. 인구가 늘어 흑해와 시칠리아까지 식민시를 세웠다. 같은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로마가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운다.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왜주 왕실이 힘을 잃자 제후들이 「왕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서로를 쳤다. 실제로는 패자 자리를 다툰 것이다.
결과170여 나라가 십여 개로 줄었다. 전쟁이 잦아지자 병법과 외교술이 발달했고, 그 혼란 속에서 공자와 제자백가가 나왔다.
43년을 다스리며 바빌론을 당대 최대의 도시로 만들었다. 이슈타르 문과 공중정원 전설이 그의 것이다.
아테네가 부채 노예로 무너지기 직전 조정자로 뽑혔다. 부자와 빈자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지만 내전은 막았다.
해당 없음
나라의 멸망 · BC 586 · 성전이 불타고 종교가 바뀌다
이집트를 믿고 두 번 반란했다가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18개월 포위를 당했다. 예루살렘 성벽이 뚫리고 솔로몬 성전이 무너졌다. 유배지에서 성경의 상당 부분이 편집되었으니, 멸망이 경전을 만든 셈이다.
【그때 그 자리】 BC 722년 북왕국이 무너진 뒤 유다만 남았다.
작았다. 예루살렘과 그 주변이다.
그런데 135년을 더 갔다.
【왜 그렇게 됐나】 BC 701년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쳐들어와 성읍 46곳을 함락했다.
예루살렘만 남았다. 그런데 함락되지 않았다.
그것이 「예루살렘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심었다.
115년 뒤 그 믿음이 문제가 된다.
그사이 아시리아가 무너지고 신바빌로니아가 일어섰다.
유다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 끼었다.
요시야 왕이 BC 609년 므깃도에서 이집트군을 막다 전사했다.
그 뒤 왕들이 이집트를 믿고 바빌로니아에 반란했다.
예레미야가 항복을 권했다. 「이 성은 반드시 바빌론 왕의 손에 넘어간다.」
매국노로 몰려 웅덩이에 던져졌다.
【어떻게 흘렀나】 BC 597년 1차 함락이다.
여호야긴 왕과 지배층이 끌려갔다. 「1차 바빌론 유수」다.
바빌론의 행정 문서에 그에게 준 기름과 곡식의 배급 기록이 남아 있다.
시드기야가 왕으로 앉혀졌다. 그도 반란했다.
BC 587~586년 18개월 포위 끝에 함락됐다.
성전이 불탔다. 성벽이 헐렸다.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끌려갔다. 아들들이 죽는 것을 보고 나서였다.
「라기스 편지」라는 도기 조각이 남아 있다. 함락 직전 전선의 장교가 보낸 것이다.
「우리는 라기스의 봉화를 보고 있습니다. 아세가의 봉화는 보이지 않습니다.」
옆 성이 이미 함락됐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보통 나라가 망하면 신도 함께 잊힌다. 진 신은 힘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유다는 달랐다.
예언자들이 다르게 설명했다. 「우리 신이 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해서 신이 벌한 것이다.」
패배가 신의 무력함이 아니라 신의 정의가 됐다.
그러자 신앙이 무너지지 않았다.
【남은 것】 성전이 없으니 제사를 못 지냈다.
대신 율법을 읽고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하는 것이 중심이 됐다.
회당이 이때 생긴 것으로 본다.
장소가 아니라 글에 매인 종교가 됐다.
구약의 상당 부분이 이 시기에 정리됐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바빌론 강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는 시편 137편이 이때의 것이다.
BC 539년 키루스가 바빌론을 함락하고 돌아가게 했다.
성전이 다시 세워졌다. 그런데 그 뒤로도 유대교는 성전 없이 살 수 있는 종교로 남았다.
AD 70년 성전이 다시 불탔을 때, 그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다.
지도에서 보기: BC 7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신아시리아 제국 리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