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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그리스 각지에 도시국가가 섰다. 왕정이 귀족정으로, 다시 참주정과 민주정으로 갈라졌다. 인구가 늘어 흑해와 시칠리아까지 식민시를 세웠다. 같은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로마가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운다.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왜주 왕실이 힘을 잃자 제후들이 「왕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서로를 쳤다. 실제로는 패자 자리를 다툰 것이다.
결과170여 나라가 십여 개로 줄었다. 전쟁이 잦아지자 병법과 외교술이 발달했고, 그 혼란 속에서 공자와 제자백가가 나왔다.
왜메디아를 무너뜨린 키루스가 서쪽 리디아와 남쪽 바빌로니아로 방향을 돌렸다.
결과8년 만에 근동 전체를 손에 넣었다. 정복민의 종교를 인정하고 유대인을 귀환시킨 관용 정책이 통치 비용을 크게 낮췄다.
작은 속국에서 시작해 20년 만에 근동 전체를 손에 넣었다. 정복민의 신과 관습을 인정한 것이 통치 비용을 크게 낮췄다.
숫자가 만물의 근원이라 믿은 사람
석가족 왕자로 나 스물아홉에 집을 나섰다. 극단적인 고행도 답이 아니라고 보고 가운데 길을 택했다. 그가 말한 것은 신이 아니라 원인이었다.
부처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브라만의 권위를 부정했다. 어떤 생명도 해치지 말라는 불살생을 끝까지 밀고 갔다.
무위자연 — 억지로 하지 않아야 오히려 잘 된다는 역설을 5천 자에 담았다. 유교와 함께 중국 사상의 두 기둥이 됐다.
해당 없음
나라의 멸망 · BC 539 · 축제 날 밤에 성문이 열렸다
오피스에서 한 번 진 뒤 바빌론 성문이 열렸다. 나보니두스 왕이 달신 숭배로 마르두크 사제단과 틀어져 있었고, 사제들이 키루스를 해방자로 맞았다. 키루스 원통에 그렇게 새겨져 있다.
【그때 그 자리】 BC 612년 아시리아의 니네베가 함락됐다.
바빌로니아와 메디아 연합군이었다.
나보폴라사르가 신바빌로니아를 열었다.
아들 네부카드네자르 2세 때 절정이었다.
【왜 그렇게 됐나】 그가 지은 것이 크다.
이슈타르 문이다. 푸른 유약 벽돌에 사자와 황소와 무슈후슈(용)를 부조로 넣었다.
행렬 대로가 그 문으로 이어졌다. 폭 20m가 넘는다.
지구라트 에테메난키를 다시 지었다. 높이 90m로 추정된다.
「바벨탑」의 원형으로 본다.
「공중정원」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대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바빌로니아 기록에 그것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 저자들만 적었다. 니네베의 것을 잘못 옮긴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어떻게 흘렀나】 마지막 왕이 나보니두스다.
특이한 인물이다.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 대신 달의 신 신(Sîn)을 높였다.
그의 어머니가 하란의 달신 여사제였다.
마르두크 사제단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10년을 아라비아의 오아시스 도시 테이마에서 지냈다. 수도를 비웠다.
왜 그랬는지 확실하지 않다. 교역로를 장악하려 했다는 설명, 종교적 이유라는 설명이 있다.
그 사이 아들 벨샤자르가 대신 다스렸다.
신년 축제를 지내지 못했다. 왕이 없으면 마르두크의 손을 잡는 의례를 할 수 없다.
그것이 정통성을 크게 해쳤다.
그가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도 기록에 남아 있다. 옛 신전 터를 파서 창건자의 비문을 찾아냈다.
「최초의 고고학자」라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BC 539년 키루스가 왔다.
오피스에서 한 번 싸운 뒤 바빌론은 거의 저항 없이 열렸다.
유프라테스의 물길을 돌려 수위를 낮추고 강바닥으로 들어갔다는 헤로도토스의 기록이 있다.
그날 도시에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고 적었다.
다니엘서의 「벽에 나타난 손글씨」 이야기가 그 밤을 배경으로 한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 쓰였고, 그날 밤 벨샤자르가 죽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사제단이 협력했다는 것이 지금의 견해다.
「키루스 원통」에 마르두크가 키루스를 불렀다고 적혀 있다.
【남은 것】 87년밖에 못 갔다.
그런데 남긴 것이 있다.
천문 기록이다. 매일 밤 관측한 것을 수백 년 치 쌓았다.
일식과 월식의 주기(사로스)를 알아냈다.
그 자료가 그리스로 갔다. 프톨레마이오스가 그것을 썼다.
황도 12궁이 여기서 나왔다.
그리고 이슈타르 문이 20세기 초 독일로 옮겨졌다. 지금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다.
지도에서 보기: BC 7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리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