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바빌로니아

3000
카메라 투어 · 아무 곳이나 누르면 멈춤
◀ 왼쪽 · 오른쪽 ▶
지도에 표시
주요 국가
오른쪽 게이지를 끌거나 키보드 ↑↓로 5천 년이 흐릅니다
지도는 휠·더블클릭·드래그 · PgUp/PgDn은 스냅샷 이동
게이지를 Shift+드래그하면 10배 정밀 · 오른쪽 눈금은 인물·전쟁·사건이 있는 자리

6억 년 전
AD 2025
시대
주요 공격
주요 공격
국사

지질시대

기후

조산운동

생물과 공룡

대멸종

인류의 이동

그 해의 정치

폴리스의 성립

그리스 각지에 도시국가가 섰다. 왕정이 귀족정으로, 다시 참주정과 민주정으로 갈라졌다. 인구가 늘어 흑해와 시칠리아까지 식민시를 세웠다. 같은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로마가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운다.

한반도

고조선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전쟁 2건

춘추시대의 패권 다툼BC 770 – BC 476
제·진·초·오·월 등 제후국

주 왕실이 힘을 잃자 제후들이 「왕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서로를 쳤다. 실제로는 패자 자리를 다툰 것이다.

성복 BC 632필 BC 597취리 BC 506

결과170여 나라가 십여 개로 줄었다. 전쟁이 잦아지자 병법과 외교술이 발달했고, 그 혼란 속에서 공자와 제자백가가 나왔다.

294년 · 170국이 십여 국으로
키루스의 정복BC 547 – BC 539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vs 리디아·바빌로니아

메디아를 무너뜨린 키루스가 서쪽 리디아와 남쪽 바빌로니아로 방향을 돌렸다.

프테리아 BC 547사르디스 함락 BC 546오피스 BC 539

결과8년 만에 근동 전체를 손에 넣었다. 정복민의 종교를 인정하고 유대인을 귀환시킨 관용 정책이 통치 비용을 크게 낮췄다.

8년 · 근동 통합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5명

키루스 2세정치BC 539 · 관용으로 다스린 정복자
BC 600 – BC 530

작은 속국에서 시작해 20년 만에 근동 전체를 손에 넣었다. 정복민의 신과 관습을 인정한 것이 통치 비용을 크게 낮췄다.

  • 메디아·리디아·바빌로니아를 차례로 정복
  • 유대인의 귀환을 허락
  • 키루스 원통 — 인권 선언의 원형으로 불림
피타고라스과학BC 530 · 공동체를 이끈 수학자
BC 570 무렵 – BC 495 무렵

숫자가 만물의 근원이라 믿은 사람

  • 직각삼각형 정리를 증명
  • 수와 음악의 조화를 발견
  • 무리수의 발견으로 믿음이 흔들림
싯다르타사상BC 528 · 부처
BC 563 무렵 – BC 483 무렵

석가족 왕자로 나 스물아홉에 집을 나섰다. 극단적인 고행도 답이 아니라고 보고 가운데 길을 택했다. 그가 말한 것은 신이 아니라 원인이었다.

  • 네 가지 진리와 연기
  •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제자를 받음
  • 사르나트에서 첫 설법
마하비라사상BC 527 · 자이나교를 세운 사람
BC 599 무렵 – BC 527 무렵

부처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브라만의 권위를 부정했다. 어떤 생명도 해치지 말라는 불살생을 끝까지 밀고 갔다.

  • 아힘사 — 해치지 않음
  • 2,500년 뒤 간디가 이것을 무기로 삼는다
노자사상BC 520 · 「도덕경」의 저자로 전하는 도가의 시조
BC 6세기 무렵(전승)

무위자연 — 억지로 하지 않아야 오히려 잘 된다는 역설을 5천 자에 담았다. 유교와 함께 중국 사상의 두 기둥이 됐다.

  • 「도덕경」 5천 자, 도가 사상의 뿌리
  • 무위(無爲)와 자연의 정치철학
  • 후대 도교에서 신격화됨

그 무렵의 사건

BC 528
석가의 깨달음
왕자가 고통의 원인을 묻고 답을 냈다.
생로병사를 보고 출가한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고통은 집착에서 오고 집착을 놓으면 벗어난다는 가르침이 인도를 넘어 동아시아 전체로 퍼진다.
BC 509
로마 공화정 수립
왕을 쫓아내고 두 명의 집정관을 뒀다.
타르퀴니우스를 추방하고 1년 임기의 집정관 둘을 뽑았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몰리지 않게 나누고 임기를 두는 발상 — 견제와 균형의 원형이 여기서 나왔다.
BC 508
아테네 민주정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시민이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추첨과 투표로 공직을 채우는 실험이 시작됐다. 2,500년 뒤 세계의 표준이 된다.
BC 500
반투의 확산
쇠와 농사를 들고 대륙 절반으로 퍼졌다.
나이지리아·카메룬 경계에서 시작한 사람들이 2,000년에 걸쳐 남쪽과 동쪽 끝까지 갔다. 얌과 바나나와 철이 함께 움직였다. 오늘 아프리카 남반부의 언어 대부분이 이 한 갈래에서 나온다.
BC 500
북미의 흙무덤
오하이오 강가에 짐승 모양의 언덕이 있다.
아데나와 호프웰이 무덤과 의례를 위해 거대한 흙둔덕을 쌓았다. 뱀 모양 둔덕은 길이가 400미터가 넘는다. 멕시코만 조개와 로키산맥 흑요석이 함께 나와, 대륙을 가로지르는 교역망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BC 585
탈레스의 일식 예언
신화 대신 자연으로 세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밀레토스의 탈레스가 일식을 미리 맞혔다고 헤로도토스가 전한다.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 한 그의 설명이 옳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 신의 뜻이 아닌 것으로 설명하려 한 태도가 철학과 과학의 시작이었다.

교역로

해당 없음

신바빌로니아

나라의 멸망 · BC 539 · 축제 날 밤에 성문이 열렸다

오피스에서 한 번 진 뒤 바빌론 성문이 열렸다. 나보니두스 왕이 달신 숭배로 마르두크 사제단과 틀어져 있었고, 사제들이 키루스를 해방자로 맞았다. 키루스 원통에 그렇게 새겨져 있다.

【그때 그 자리】 BC 612년 아시리아의 니네베가 함락됐다.

바빌로니아와 메디아 연합군이었다.

나보폴라사르가 신바빌로니아를 열었다.

아들 네부카드네자르 2세 때 절정이었다.

【왜 그렇게 됐나】 그가 지은 것이 크다.

이슈타르 문이다. 푸른 유약 벽돌에 사자와 황소와 무슈후슈(용)를 부조로 넣었다.

행렬 대로가 그 문으로 이어졌다. 폭 20m가 넘는다.

지구라트 에테메난키를 다시 지었다. 높이 90m로 추정된다.

「바벨탑」의 원형으로 본다.

「공중정원」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대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바빌로니아 기록에 그것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 저자들만 적었다. 니네베의 것을 잘못 옮긴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어떻게 흘렀나】 마지막 왕이 나보니두스다.

특이한 인물이다.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 대신 달의 신 신(Sîn)을 높였다.

그의 어머니가 하란의 달신 여사제였다.

마르두크 사제단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10년을 아라비아의 오아시스 도시 테이마에서 지냈다. 수도를 비웠다.

왜 그랬는지 확실하지 않다. 교역로를 장악하려 했다는 설명, 종교적 이유라는 설명이 있다.

그 사이 아들 벨샤자르가 대신 다스렸다.

신년 축제를 지내지 못했다. 왕이 없으면 마르두크의 손을 잡는 의례를 할 수 없다.

그것이 정통성을 크게 해쳤다.

그가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도 기록에 남아 있다. 옛 신전 터를 파서 창건자의 비문을 찾아냈다.

「최초의 고고학자」라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BC 539년 키루스가 왔다.

오피스에서 한 번 싸운 뒤 바빌론은 거의 저항 없이 열렸다.

유프라테스의 물길을 돌려 수위를 낮추고 강바닥으로 들어갔다는 헤로도토스의 기록이 있다.

그날 도시에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고 적었다.

다니엘서의 「벽에 나타난 손글씨」 이야기가 그 밤을 배경으로 한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 쓰였고, 그날 밤 벨샤자르가 죽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사제단이 협력했다는 것이 지금의 견해다.

「키루스 원통」에 마르두크가 키루스를 불렀다고 적혀 있다.

【남은 것】 87년밖에 못 갔다.

그런데 남긴 것이 있다.

천문 기록이다. 매일 밤 관측한 것을 수백 년 치 쌓았다.

일식과 월식의 주기(사로스)를 알아냈다.

그 자료가 그리스로 갔다. 프톨레마이오스가 그것을 썼다.

황도 12궁이 여기서 나왔다.

그리고 이슈타르 문이 20세기 초 독일로 옮겨졌다. 지금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다.

지도에서 보기: BC 7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리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