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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미케네 궁전 문명이 무너진 뒤 문자도 왕궁도 사라졌다. 작은 촌락 단위로 흩어져 살았고 이 시기의 기록은 거의 남지 않았다.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왜봉건으로 나눠 준 제후들이 점차 왕실 말을 듣지 않았다. 서쪽 견융의 압박은 계속 커졌다.
결과유왕이 견융에게 죽고 왕실이 동쪽 낙읍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주 왕은 이름만 남고 춘추시대가 시작된다.
해당 없음
해당 없음
사건 · BC 814 · 쇠가죽 한 장만큼의 땅
티레의 디도가 망명해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 소가죽 한 장 넓이만 달라 해놓고 가죽을 실처럼 잘라 언덕을 둘렀다는. 실제로는 티레의 교역 거점이었고, 600년 뒤 로마와 지중해를 두고 세 번 싸운다.
【그때 그 자리】 BC 9세기 무렵이다. 페니키아의 도시 티레에서 왕가의 다툼이 있었다.
공주 엘리사(디도)의 남편을 오라비 피그말리온 왕이 죽였다. 재산을 노린 것이다.
엘리사가 배를 타고 달아났다.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지중해를 서쪽으로 건너 북아프리카에 닿았다.
【왜 그렇게 됐나】 현지의 왕에게 땅을 청했다. 왕이 「쇠가죽 한 장으로 덮을 만큼만 주겠다」고 했다.
엘리사가 쇠가죽을 실처럼 가늘게 잘라 이어 붙였다. 그 끈으로 언덕 하나를 통째로 둘러쌌다.
그 언덕이 비르사다 — 그리스어로 「쇠가죽」이라는 뜻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전설이다. 다만 이 이야기가 오래 전해진 데는 이유가 있다 — 페니키아인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무력이 아니라 계약과 꾀로 자리를 얻는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흘렀나】 이름 「카르트하다쉬트」는 「새 도시」라는 뜻이다.
위치가 전부였다. 지중해의 잘록한 허리, 시칠리아 바로 남쪽이다. 동지중해와 서지중해를 오가는 배가 지나는 길목이다.
본국 티레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게 차례로 무너지면서, 식민시였던 카르타고가 오히려 중심이 됐다.
제해권을 쥐었다. 지브롤터 너머 대서양까지 갔다 — 한노라는 항해자가 아프리카 서안을 따라 내려간 기록이 남아 있다.
성벽 안에 인공 항구를 만들었다. 원형 군항에 배 220척을 댈 수 있는 선거(船渠)가 있었다고 전한다. 발굴로 그 형태가 확인됐다.
【그래서】 로마와 세 번 싸웠다.
BC 146년 3차 포에니 전쟁으로 도시가 지워졌다. 17일을 불태웠고, 살아남은 5만 명을 노예로 팔았다.
땅에 소금을 뿌렸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고대 사료에는 없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이야기다.
【남은 것】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스」에서 이 전설을 다시 썼다.
트로이에서 도망친 아이네아스가 카르타고에 닿고, 디도 여왕이 그를 사랑한다. 그가 로마를 세우러 떠나자 디도가 스스로 불에 뛰어들며 저주한다 — 두 나라가 영원히 원수가 되리라는 것이다.
포에니 전쟁의 신화적 기원을 만든 셈이다.
카르타고 사람들이 남긴 글은 거의 없다. 우리가 아는 카르타고는 그들을 없앤 쪽이 쓴 것이다.
아이 제물 이야기도 그렇다. 오래 로마 쪽 선전으로 여겨졌는데, 발굴에서 유아 유골 수천 구가 나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 교외에 유적이 있다. 로마가 100년 뒤 그 자리에 다시 도시를 세웠다.
지도에서 보기: BC 10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폴리스의 형성 페니키아의 바다 고조선의 8조법 제1회 올림피아 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