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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공화정의 외피를 남긴 채 1인 지배를 세웠다. 200년간 지중해 전역에 큰 전쟁이 없었고 속주마다 도시와 도로와 수도교가 깔렸다.
신라·고구려·백제가 차례로 서고 가야가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았다. 아직 연맹왕국 단계로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
해당 없음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가 로마의 조상이 된다는 이야기로 아우구스투스의 새 질서에 신화를 입혔다. 단테는 그를 저승길 안내자로 삼았다.
공화정의 외피를 남긴 채 1인 지배를 세웠다. 200년의 로마 평화가 여기서 시작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300년의 마지막 통치자. 로마의 힘을 빌려 왕국을 지키려 했으나 악티움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갈리아를 정복한 군대로 로마를 차지했다. 공화정을 끝냈고 원로원에서 살해됐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도시 · BC 18 · 장수왕에게 함락됐다
【그때 그 자리】
백제의 첫 수도다. 지금 서울 송파구 일대로 본다.
한강 하류의 이 자리는 조건이 좋았다. 넓은 평야가 있고, 서해로 나가면 중국 남조와 곧장 이어지며, 강을 따라 내륙으로도 통한다. 삼국이 500년을 이 강을 두고 싸운 이유다.
삼국사기는 기원전 18년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하남위례성과 하북위례성을 오갔고, 뒤에 한성으로 불렸다.
【왜 그렇게 됐나】
발굴로 드러난 것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다.
풍납토성은 둘레 3.5킬로미터로 추정되는 흙성이다. 밑변 폭이 40미터가 넘고 높이가 11미터 이상이었다. 쌓는 데 든 흙이 수십만 세제곱미터로, 연인원 100만 명 이상이 동원됐을 것으로 계산된다. 이만한 공사를 하려면 이미 강한 국가가 있어야 한다.
이 성이 왕성이었다는 것이 지금 다수설이다. 안에서 대형 건물터와 제사 유구, 중국제 도자기와 유리구슬이 나왔다.
【어떻게 흘렀나】
4세기 근초고왕 때가 절정이었다. 371년 평양성을 쳐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 백제는 바다로 뻗었다. 중국 동진과 통하고 왜에 문물을 보냈다. 칠지도가 그 흔적이다.
475년에 뒤집혔다. 고구려 장수왕이 3만을 이끌고 와 이레 만에 성을 함락했다. 개로왕이 성을 나가려다 붙잡혀 아차산 아래에서 죽었다.
삼국사기에 개로왕이 바둑에 빠져 도림이라는 첩자에게 속아 국고를 탕진하고 성을 쌓느라 국력을 소모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만 이 서술은 망한 이유를 왕 개인에게 돌리는 전형적인 방식이라 그대로 읽기 어렵다.
백제는 웅진, 지금의 공주로 쫓겨 내려갔다.
【그래서】
한강은 이후 고구려가 80년, 신라가 그 뒤를 차지했다. 551년 백제 성왕이 신라와 손잡고 되찾았으나 2년 만에 신라가 가져갔다. 성왕은 보복에 나섰다가 554년 관산성에서 죽었다.
한강을 쥔 신라가 서해로 나가 당과 직접 통했고, 그것이 나당 동맹으로 이어진다.
【남은 것】
풍납토성은 오랫동안 그냥 마을이었다. 위에 아파트와 주택이 들어섰다.
1997년 아파트 공사 중에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형구 교수가 현장에 들어가 확인하면서 알려졌다. 이후 발굴과 보상과 주민 갈등이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땅값이 비싼 서울 한복판이라 전면 발굴이 어렵다. 지금까지 조사된 것이 전체의 10퍼센트 안팎이다.
500년 도읍의 자리가 아파트 아래에 있다. 그 아래에 무엇이 더 있는지 아직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