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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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억 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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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원수정과 로마 평화

아우구스투스가 공화정의 외피를 남긴 채 1인 지배를 세웠다. 200년간 지중해 전역에 큰 전쟁이 없었고 속주마다 도시와 도로와 수도교가 깔렸다.

한반도

삼국의 성립

신라·고구려·백제가 차례로 서고 가야가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았다. 아직 연맹왕국 단계로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

전쟁 1건

로마의 게르마니아 원정BC 12 – 9
로마 vs 게르만 부족

라인강 너머를 속주로 만들려 했다. 20년간 착실히 진행되던 계획이었다.

엘베강 진출 BC 9토이토부르크 숲 AD 9

결과아르미니우스가 로마군 3개 군단 2만을 숲에서 전멸시켰다. 아우구스투스는 「바루스여, 내 군단을 돌려다오」라 외쳤고 로마는 라인강에서 멈췄다 — 유럽이 라틴권과 게르만권으로 갈린 자리다.

21년 · 유럽을 둘로 가른 경계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1명

베르길리우스예술BC 19 · 로마의 건국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시인
BC 70 – BC 19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가 로마의 조상이 된다는 이야기로 아우구스투스의 새 질서에 신화를 입혔다. 단테는 그를 저승길 안내자로 삼았다.

  • 「아이네이스」 12권
  • 「농경시」「목가」
  • 중세·르네상스 라틴 문학의 표준

그 무렵의 사건

30
예수의 처형
로마 속주 유대에서 벌어진 처형이 세계 종교의 출발점이 됐다.
속주의 처형 하나가 300년 뒤 제국의 국교가 되는 종교의 출발점이 됐다.
BC 27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가 첫 황제가 됐다. 200년의 로마 평화가 시작된다.
이후 200년간 지중해 전역에 큰 전쟁이 없었다. 도시와 도로와 수도교가 깔렸다.
BC 44
카이사르 암살
원로원에서 살해됐다. 공화정 회복 대신 제국이 왔다.
공화정 회복을 노린 암살이 오히려 제정을 앞당겼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인도양 계절풍 항로BC 100 – 700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오간 것로마의 금화가 인도로 흘러가고 후추가 로마로 왔다. 로마 원로원이 금 유출을 걱정할 정도였다.
거점미오스호르모스 · 아덴 · 소코트라 · 무지리스

국내성

도시 · 3 · 장수왕이 평양으로 옮겼다

【그때 그 자리】

압록강 중류 북안, 지금 중국 지린성 지안이다.

고구려는 졸본에서 시작해 3년 무렵 유리왕 때 여기로 옮겼다. 이후 427년 평양 천도까지 400년 넘게 수도였다.

자리를 고른 이유가 지형에 있다. 압록강이 앞을 막고 뒤로 산이 둘러싼다. 강을 따라 배가 다니고 좁은 평지가 있어 사람이 살 수 있다.

고구려의 성 쌓기 방식이 여기서 보인다. 평지에 국내성을 두고, 산 위에 환도산성을 따로 두었다. 평소에는 평지 성에 살다가 적이 오면 산성으로 들어간다. 이 두 짝 구조가 고구려 성곽의 특징이다.

【왜 그렇게 됐나】

이 구조가 실제로 여러 번 나라를 살렸다.

244년 위의 관구검이 쳐들어와 환도성이 함락됐다. 동천왕이 옥저까지 달아났다가 돌아왔다. 342년 전연의 모용황이 와서 다시 무너졌다. 미천왕의 시신을 파 가고 태후를 끌고 갔다.

두 번 다 수도가 함락됐는데 나라는 이어졌다. 산과 강이 많은 지형이라 왕이 피할 곳이 있었고, 지방의 성들이 각자 버텼기 때문이다.

【어떻게 흘렀나】

지안 일대에 고구려 무덤이 1만 2천 기 넘게 남아 있다.

장군총은 화강암을 계단식으로 일곱 층 쌓은 무덤이다. 한 변 31미터, 높이 12미터가 넘는다.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지금도 거의 어긋남이 없다. 장수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나 확정되지 않았다.

광개토왕릉비가 그 근처에 서 있다. 414년 장수왕이 세웠다. 높이 6.4미터의 자연석에 1,775자를 새겼다. 고구려의 건국 설화와 광개토왕의 정복 기록, 그리고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이 비석의 신묘년 기사 한 줄이 19세기 말 일본 육군에 의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됐고, 그 해석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 비면에 석회가 발라져 있어 변조 논란도 오래 이어졌다.

무덤 벽화도 남았다. 씨름하는 사람, 사냥하는 기마인, 춤추는 무리가 그려져 있다. 문헌이 전하지 않는 생활을 직접 보여준다.

【그래서】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옮겼다. 국내성은 좁았고, 남쪽으로 나아가려면 위치를 바꿔야 했다.

이 천도에 반발이 있었다. 국내성 기반의 귀족들이 힘을 잃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장수왕이 그들을 숙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천도가 곧 권력 재편이었다.

【남은 것】

2004년 고구려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중국의 신청으로 등재됐고, 같은 해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도 함께 등재됐다.

이 등재를 전후해 동북공정 논란이 있었다.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 영토 안의 지방정권으로 서술한 것이다.

지금 지안에 가면 국내성의 성벽 일부가 시내 한가운데 남아 있다. 아파트와 상가 사이에 돌담처럼 서 있다. 400년 도읍의 흔적이다.

지도에서 보기: BC 1년의 세계 · 같은 시대: 마인츠 바르셀로나 한성 졸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