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투어 · 아무 곳이나 누르면 멈춤
지도에 표시
지도는 휠·더블클릭·드래그 · PgUp/PgDn은 스냅샷 이동
게이지를 Shift+드래그하면 10배 정밀 · 오른쪽 눈금은 인물·전쟁·사건이 있는 자리
틀린 데나 빠진 데를 알려주시면 확인하고 고칩니다.
이 브라우저에만 저장됩니다. 서버로 아무것도 보내지 않습니다.
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왜에데사 백국이 함락되자 베르나르의 설교로 두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결과다마스쿠스 포위 나흘 만에 철수하며 완패했다. 이 실패가 무슬림 세력을 결집시켜 살라흐 앗 딘의 등장을 앞당겼다.
코르도바의 법관이자 의사이자 철학자. 그의 주석 덕에 유럽이 잊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읽었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전쟁 · 1147 · 왕 둘이 나서서 아무것도 못 얻었다
에데사 백국이 함락되자 베르나르의 설교로 두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다마스쿠스 포위 나흘 만에 철수하며 완패했다. 이 실패가 무슬림 세력을 결집시켜 살라흐 앗 딘의 등장을 앞당겼다.
【그때 그 자리】 1차 십자군이 1099년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네 개의 십자군 국가를 세웠다.
그 가운데 가장 북쪽, 가장 앞에 있던 것이 에데사 백국이다.
1144년 모술의 장기가 에데사를 함락했다. 십자군 국가가 처음으로 무너진 것이다.
【왜 그렇게 됐나】 교황 에우제니오 3세가 새 십자군을 선포했다.
설교를 맡은 사람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성직자였다.
베즐레에서 설교하자 사람이 몰렸다. 십자가 표시로 나눠 줄 천이 모자라 자기 옷을 찢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번에는 왕들이 직접 나섰다.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다. 1차 때는 왕이 없었다.
루이 7세의 왕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도 따라갔다.
【어떻게 흘렀나】 시작부터 어긋났다.
가는 길에 비잔티움과 사이가 나빴다. 소아시아를 지나며 셀주크의 습격으로 독일군이 거의 궤멸했다. 프랑스군도 크게 상했다.
겨우 도착한 뒤 회의를 열었다. 에데사를 되찾으러 왔는데, 논의 끝에 목표를 다마스쿠스로 바꿨다.
다마스쿠스는 당시 예루살렘 왕국과 우호 관계였다. 장기 세력에 맞서는 완충지였다.
1148년 7월 포위했다. 물이 있는 과수원 쪽에 진을 쳤다가, 성벽이 약한 곳으로 옮기자며 물 없는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쪽 성벽이 더 튼튼했고 물이 없었다. 나흘 만에 물러났다.
【그래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다마스쿠스가 십자군을 적으로 돌렸다. 몇 해 뒤 누레딘에게 넘어가고, 그 뒤 살라흐 앗딘의 손에 들어간다.
이슬람 쪽이 하나로 묶이는 계기가 됐다. 39년 뒤 살라흐 앗딘이 예루살렘을 되찾는다.
【남은 것】 베르나르가 비난을 받았다. 그가 답했다 — 「내가 약속한 것은 신의 뜻이었지 승리가 아니었다.」 실패를 십자군 자신의 죄 탓으로 돌렸다.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의 사이가 이 원정에서 틀어졌다. 4년 뒤 혼인이 무효화됐고, 그가 곧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재혼했다.
엘레오노르가 가져간 아키텐 땅이 잉글랜드 왕의 것이 됐다. 그것이 300년 뒤 백년전쟁의 씨앗 가운데 하나가 된다.
십자군의 성공이 우연이었고 실패가 본래 모습이라는 것이, 이 원정에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