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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왜송이 요를 치려고 금과 손잡았는데, 요가 사라지자 완충지대도 함께 사라졌다.
결과휘종·흠종 부자와 황족 3,000명이 만주로 끌려갔다. 남은 황자가 강남에서 남송을 이었고, 중국의 경제 중심이 이때 남쪽으로 옮겨간다.
물을 다스려 일어선 나라의 절정이었다. 해자 한 변이 1.5킬로미터인 사원을 자기 무덤으로 지었다. 돌 500만 톤을 40킬로미터 밖에서 수로로 실어 왔다.
코르도바의 법관이자 의사이자 철학자. 그의 주석 덕에 유럽이 잊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읽었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전쟁 · 1125 · 금 vs 북송
송이 요를 치려고 금과 손잡았는데, 요가 사라지자 완충지대도 함께 사라졌다. 휘종·흠종 부자와 황족 3,000명이 만주로 끌려갔다. 남은 황자가 강남에서 남송을 이었고, 중국의 경제 중심이 이때 남쪽으로 옮겨간다.
【그때 그 자리】
12세기 초 북송은 안이 부유하고 밖이 약했다. 조광윤이 무신의 권한을 억누른 뒤 300년간 군사 쿠데타가 없었지만, 그만큼 군대가 약했다.
요와 서하에 해마다 은과 비단을 보내 평화를 샀다. 국력으로 보면 감당할 만한 액수였고, 전쟁보다 싸게 먹힌다는 계산이었다.
휘종은 예술가였다. 그림을 잘 그렸고 수금체라는 서체를 만들었다. 정치에는 관심이 적었다.
그가 화석강이라는 사업을 벌였다. 강남의 기이한 돌과 나무를 수도로 실어 와 정원을 만드는 것이다. 이 운송에 백성이 동원돼 원성이 컸다. 수호전의 배경이 이 시기다.
【왜 그렇게 됐나】
만주에서 여진족이 일어나 1115년 금을 세웠다.
송이 금에 손을 내밀었다. 함께 요를 치고 연운 16주를 되찾자는 것이었다. 200년 전 잃은 땅이다.
1125년 요가 무너졌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송의 실상이 드러났다. 송군은 이미 지친 요군에게도 여러 차례 졌다. 금이 이를 봤다.
연운 16주를 돌려받는 조건도 지키지 못했다. 송이 요의 잔당과 몰래 연락한 것이 발각됐다.
【어떻게 흘렀나】
1125년 금이 남하했다. 휘종은 겁을 먹고 아들 흠종에게 자리를 넘기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첫 번째 포위는 막대한 배상을 약속하고 풀었다. 금이 물러나자 송 조정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126년 금이 다시 왔다. 이번에는 달랐다.
조정은 방어 대신 이상한 방법에 기댔다. 곽경이라는 자가 도술로 금군을 물리치겠다며 신병 7,777명을 모았다. 성문을 열고 나갔다가 몰살했다. 그 문으로 금군이 들어왔다.
1127년 개봉이 함락됐다.
금은 도시를 약탈하고 휘종과 흠종을 비롯해 황족과 관리와 장인 3천여 명을 북으로 끌고 갔다. 황후와 공주들이 포함됐다. 이들 상당수가 노비나 첩이 됐다.
두 황제는 만주에서 죽었다. 휘종은 8년, 흠종은 30년을 갇혀 있었다.
【그래서】
휘종의 아홉째 아들 조구가 마침 밖에 있어 화를 면했다. 남쪽으로 달아나 임안에서 황제가 됐다. 남송이다.
화이허 이북을 잃었다. 영토의 절반과 인구의 절반이다.
【남은 것】
이 사건은 중국사에서 가장 큰 치욕으로 기억된다. 정강은 흠종의 연호다.
악비가 지었다고 전하는 만강홍에 정강의 치욕이 아직 씻기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다. 이 노래가 20세기 중일전쟁 때 다시 불렸다.
교훈으로 자주 인용되는 것이 동맹의 문제다. 송은 금과 손잡고 요를 쳤고, 그 금에게 무너졌다. 100여 년 뒤 남송은 몽골과 손잡고 금을 쳤고, 그 몽골에게 무너졌다. 같은 실수를 두 번 했다.
다만 다른 선택이 있었는가는 논쟁이다. 약한 나라가 강한 이웃 둘 사이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조선에서도 이 사건이 자주 인용됐다. 병자호란 때 척화파와 주화파가 각자 이 역사를 근거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