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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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억 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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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봉건 유럽과 십자군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한반도

고려 전기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전쟁 1건

정강의 변1125 – 1127
금 vs 북송

송이 요를 치려고 금과 손잡았는데, 요가 사라지자 완충지대도 함께 사라졌다.

개봉 포위 1126개봉 함락 1127

결과휘종·흠종 부자와 황족 3,000명이 만주로 끌려갔다. 남은 황자가 강남에서 남송을 이었고, 중국의 경제 중심이 이때 남쪽으로 옮겨간다.

2년 · 황제 둘이 포로가 되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2명

수리야바르만 2세정치1120 · 앙코르 와트를 지은 왕
1113 – 1150 재위

물을 다스려 일어선 나라의 절정이었다. 해자 한 변이 1.5킬로미터인 사원을 자기 무덤으로 지었다. 돌 500만 톤을 40킬로미터 밖에서 수로로 실어 왔다.

  • 앙코르 와트
  • 회랑 800미터에 새긴 힌두 신화
  • 크메르 최대 판도
이븐 루시드사상1150 · 아리스토텔레스를 유럽에 돌려준 사람
AD 1126 – AD 1198

코르도바의 법관이자 의사이자 철학자. 그의 주석 덕에 유럽이 잊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읽었다.

  •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주석 — 라틴어로 번역돼 유럽으로
  • 이성과 신앙은 충돌하지 않는다고 주장
  • 말년에 이단으로 몰려 저작이 불태워짐

그 무렵의 사건

1126
이자겸의 난
고려 왕실과 겹사돈을 맺어 최고 권력을 누리던 외척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됐다.
이자겸은 두 딸을 예종과 인종에게 각각 시집보내며 왕실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라는 이중의 위치로 권력을 독점했다. 인종이 그의 권력을 견제하려 하자, 이자겸은 척준경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불태우기까지 했다(1126년). 그러나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에 틈이 벌어지면서 결국 척준경이 이자겸을 배신해 제거했고, 반란은 진압됐다. 이 사건은 고려 중기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며 곧이어 벌어질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의 배경이 됐다.
1135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승려 묘청은 개경의 지덕이 다했다며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됐다.
이자겸의 난 이후 혼란한 정국에서, 묘청은 풍수지리를 내세워 개경 대신 서경으로 천도하면 나라가 다시 융성하고 금나라를 정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개경의 문벌 귀족들(김부식 등)이 이 주장에 강하게 반대해 천도가 무산되자, 묘청은 서경에서 '대위국'을 세우고 반란을 일으켰다(1135년).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이 1년 만에 반란을 진압했다. 이 사건은 자주적 대외 노선과 사대적 노선, 서경 세력과 개경 세력 사이의 대립을 보여준 사건으로 자주 거론된다.
1113
앙코르의 물길
사람이 판 저수지 하나가 길이 8킬로미터였다.
우기에 넘치고 건기에 마르는 땅을 저수지와 수로로 다스렸다. 1년에 두세 번 벼를 거뒀고 그 잉여가 사원을 지었다. 도시 면적이 1,000제곱킬로미터로 산업화 이전 세계 최대였다는 평가가 있다. 15세기에 가뭄과 폭우가 번갈아 오며 그 수로가 무너졌다.
1107
윤관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국경을 위협하자, 윤관은 특수 부대 별무반을 창설해 이들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았다.
여진족과의 첫 전투에서 고려의 기존 군대가 기병 중심인 여진족에 고전하자, 윤관은 기병·보병·승병을 아우르는 특수 부대 별무반을 조직해 재정비했다. 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북방으로 몰아낸 뒤, 그 자리에 9개의 성(동북 9성)을 쌓아 새 영토로 편입했다(1107년). 그러나 이 지역을 지키는 데 드는 비용과 여진의 거센 반환 요구 등을 고려해, 고려는 몇 년 뒤 이 땅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철수했다.
1150
앙코르 문명
저수지와 수로로 백만 명을 먹인 동남아시아 최대의 도시 문명이었다.
802년 자야바르만 2세가 스스로를 「전 우주의 지배자」로 선포하며 시작됐다. 거대한 저수지(바라이)와 수로망으로 논에 물을 대 인구를 지탱했다 — 최근 레이더 측량으로 앙코르와트 주변에 근대 이전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2세기 수리야바르만 2세가 힌두 사원으로 앙코르와트를 세웠고, 훗날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다. 왜 무너졌는지는 여러 설이 겹친다 — 수리 시설 과부하설, 아유타야와의 거듭된 전쟁설, 상좌부 불교로 옮아가며 신왕 이념이 힘을 잃었다는 설, 나이테 연구로 밝혀진 극단적 가뭄과 폭우의 반복이라는 기후설이 나란히 있다. 1431년 아유타야에 함락된 뒤 도읍을 남쪽으로 옮겼지만, 앙코르와트 자체는 승려들이 계속 관리해 완전히 버려진 적은 없다.
1077
카노사의 굴욕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눈 속에서 사흘을 맨발로 서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사죄했다.
주교를 누가 임명하느냐는 서임권 다툼에서 교황은 황제를 파문했고, 제후들이 황제를 버리려 하자 하인리히는 알프스를 넘어 카노사 성 앞에 섰다. 교황은 용서했지만 황제는 곧 힘을 회복해 로마로 쳐들어갔다. 이 사건은 교권이 왕권 위에 선 상징이자, 세속 권력과 교회가 갈라지는 서유럽 특유의 이중 구조를 굳힌 장면이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정강의 변

전쟁 · 1125 · 금 vs 북송

송이 요를 치려고 금과 손잡았는데, 요가 사라지자 완충지대도 함께 사라졌다. 휘종·흠종 부자와 황족 3,000명이 만주로 끌려갔다. 남은 황자가 강남에서 남송을 이었고, 중국의 경제 중심이 이때 남쪽으로 옮겨간다.

【그때 그 자리】

12세기 초 북송은 안이 부유하고 밖이 약했다. 조광윤이 무신의 권한을 억누른 뒤 300년간 군사 쿠데타가 없었지만, 그만큼 군대가 약했다.

요와 서하에 해마다 은과 비단을 보내 평화를 샀다. 국력으로 보면 감당할 만한 액수였고, 전쟁보다 싸게 먹힌다는 계산이었다.

휘종은 예술가였다. 그림을 잘 그렸고 수금체라는 서체를 만들었다. 정치에는 관심이 적었다.

그가 화석강이라는 사업을 벌였다. 강남의 기이한 돌과 나무를 수도로 실어 와 정원을 만드는 것이다. 이 운송에 백성이 동원돼 원성이 컸다. 수호전의 배경이 이 시기다.

【왜 그렇게 됐나】

만주에서 여진족이 일어나 1115년 금을 세웠다.

송이 금에 손을 내밀었다. 함께 요를 치고 연운 16주를 되찾자는 것이었다. 200년 전 잃은 땅이다.

1125년 요가 무너졌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송의 실상이 드러났다. 송군은 이미 지친 요군에게도 여러 차례 졌다. 금이 이를 봤다.

연운 16주를 돌려받는 조건도 지키지 못했다. 송이 요의 잔당과 몰래 연락한 것이 발각됐다.

【어떻게 흘렀나】

1125년 금이 남하했다. 휘종은 겁을 먹고 아들 흠종에게 자리를 넘기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첫 번째 포위는 막대한 배상을 약속하고 풀었다. 금이 물러나자 송 조정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126년 금이 다시 왔다. 이번에는 달랐다.

조정은 방어 대신 이상한 방법에 기댔다. 곽경이라는 자가 도술로 금군을 물리치겠다며 신병 7,777명을 모았다. 성문을 열고 나갔다가 몰살했다. 그 문으로 금군이 들어왔다.

1127년 개봉이 함락됐다.

금은 도시를 약탈하고 휘종과 흠종을 비롯해 황족과 관리와 장인 3천여 명을 북으로 끌고 갔다. 황후와 공주들이 포함됐다. 이들 상당수가 노비나 첩이 됐다.

두 황제는 만주에서 죽었다. 휘종은 8년, 흠종은 30년을 갇혀 있었다.

【그래서】

휘종의 아홉째 아들 조구가 마침 밖에 있어 화를 면했다. 남쪽으로 달아나 임안에서 황제가 됐다. 남송이다.

화이허 이북을 잃었다. 영토의 절반과 인구의 절반이다.

【남은 것】

이 사건은 중국사에서 가장 큰 치욕으로 기억된다. 정강은 흠종의 연호다.

악비가 지었다고 전하는 만강홍에 정강의 치욕이 아직 씻기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다. 이 노래가 20세기 중일전쟁 때 다시 불렸다.

교훈으로 자주 인용되는 것이 동맹의 문제다. 송은 금과 손잡고 요를 쳤고, 그 금에게 무너졌다. 100여 년 뒤 남송은 몽골과 손잡고 금을 쳤고, 그 몽골에게 무너졌다. 같은 실수를 두 번 했다.

다만 다른 선택이 있었는가는 논쟁이다. 약한 나라가 강한 이웃 둘 사이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조선에서도 이 사건이 자주 인용됐다. 병자호란 때 척화파와 주화파가 각자 이 역사를 근거로 들었다.

지도에서 보기: 11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제2차 십자군 제1차 십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