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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라틴 유럽·비잔틴·이슬람이 지중해를 나눠 가졌다. 카롤루스의 제국은 곧 쪼개졌고 바이킹과 마자르가 유럽을 휘저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당이 무너지고 송이 섰다.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왜인구 압력과 흘수 얕은 롱십이 결합했다. 강을 거슬러 내륙까지 들이닥칠 수 있는 배가 결정적이었다.
결과약탈로 시작해 정착과 건국으로 끝났다. 노르망디·러시아·아이슬란드가 이들의 손에서 생겼고, 북아메리카에도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닿았다.
왜송과 맞서던 거란이 배후의 고려를 먼저 굴복시키려 했다. 1차는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으며 끝났지만,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2차, 강동 6주 반환 요구로 3차 침입이 이어졌다.
결과세 차례 침입을 모두 막아 냈다. 귀주대첩 뒤 거란은 다시 대군을 보내지 못했고, 고려·거란·송의 균형이 한 세기 이어졌다.
여러 종교를 알아본 끝에 비잔티움의 정교회를 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선택으로 러시아가 서유럽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 쪽 문화권에 들어갔다.
궁정 여성으로 한자가 아니라 히라가나로 썼다. 남자들이 한문을 쓰는 동안 여성이 자기 말로 문학을 만들었다. 세계 최초의 장편소설로 꼽히기도 한다.
귀주에서 거란의 10만 대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이후 백 년의 평화가 왔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전쟁 · 993 · 담판으로 땅을 얻고 귀주에서 끝낸 27년
송과 맞서던 거란이 배후의 고려를 먼저 굴복시키려 했다. 1차는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으며 끝났지만,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2차, 강동 6주 반환 요구로 3차 침입이 이어졌다. 세 차례 침입을 모두 막아 냈다. 귀주대첩 뒤 거란은 다시 대군을 보내지 못했고, 고려·거란·송의 균형이 한 세기 이어졌다.
거란(요)은 송과 중원을 다투면서 배후의 고려가 송과 손잡는 것을 두려워했다. 993년 소손녕이 80만을 일컫는 군사로 쳐들어왔을 때,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이며 거란과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이 길을 막기 때문」이라고 맞섰다. 거란은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고려가 차지하는 것을 인정하고 물러갔다.
1010년 강조가 목종을 폐한 정변을 구실로 성종이 40만을 이끌고 직접 침입했다. 통주에서 강조의 30만이 무너지고 개경이 불탔다. 현종은 나주까지 피란했지만, 흥화진의 양규가 후방을 치며 거란군은 포로를 되찾으며 물러났다.
1018년 소배압의 10만이 세 번째로 쳐들어왔다. 강감찬은 흥화진 앞 삼교천을 쇠가죽으로 막았다가 터뜨려 첫 타격을 주었고, 개경 근처까지 내려온 거란군은 보급이 끊겨 돌아섰다. 1019년 2월 귀주 들판에서 고려군 20만 8천이 이들을 맞았다. 바람이 거란 쪽으로 바뀐 것을 틈타 총공격했고,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이었다고 전한다.
이 승리 뒤 거란은 다시 대군을 보내지 못했고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는 조건으로 국교를 회복했다. 고려·거란·송이 서로를 견제하는 균형이 한 세기 넘게 이어졌다. 고려는 이때부터 1033년까지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까지 천리장성을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