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투어 · 아무 곳이나 누르면 멈춤
지도에 표시
지도는 휠·더블클릭·드래그 · PgUp/PgDn은 스냅샷 이동
게이지를 Shift+드래그하면 10배 정밀 · 오른쪽 눈금은 인물·전쟁·사건이 있는 자리
틀린 데나 빠진 데를 알려주시면 확인하고 고칩니다.
이 브라우저에만 저장됩니다. 서버로 아무것도 보내지 않습니다.
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라틴 유럽·비잔틴·이슬람이 지중해를 나눠 가졌다. 카롤루스의 제국은 곧 쪼개졌고 바이킹과 마자르가 유럽을 휘저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당이 무너지고 송이 섰다.
신라가 당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을 통일했고 북쪽에는 발해가 섰다. 신라 말 호족이 일어나며 후삼국으로 갈라진다.
왜중앙아시아 패권을 두고 서진하던 당과 동진하던 아바스가 처음으로 마주쳤다.
결과당이 패해 중앙아시아에서 물러났다. 포로를 통해 제지술이 이슬람권에 전해졌다.
관직에는 오래 붙어 있지 못하고 평생을 떠돌았다. 즉흥으로 지은 시 1,000여 편이 남았다.
아바스가 우마이야 일족을 몰살할 때 혼자 살아 다섯 해를 도피해 이베리아에 닿았다. 거기서 코르도바에 나라를 세웠고 300년을 갔다.
「나라는 부서졌으나 산하는 남았다」— 이백이 하늘의 시인이라면 두보는 땅의 시인이었다.
궁재로서 왕보다 실권을 쥐었다. 투르에서 우마이야 기병을 보병 방진으로 막아냈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전쟁 · 751 · 아바스 칼리파국 vs 당
중앙아시아 패권을 두고 서진하던 당과 동진하던 아바스가 처음으로 마주쳤다. 당이 패해 중앙아시아에서 물러났다. 포로를 통해 제지술이 이슬람권에 전해졌다.
【그때 그 자리】
8세기 중반 두 제국이 중앙아시아에서 만났다.
동쪽에서 당이 왔다. 현종의 개원의 치로 절정에 있었고, 서역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안서도호부 아래 두었다.
서쪽에서 아바스가 왔다. 750년 우마이야를 뒤엎고 막 들어선 참이었다.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그 사이에 소그드인의 도시들이 있었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와 타슈켄트다. 이들은 실크로드 무역을 쥔 상인 집단이었다.
【왜 그렇게 됐나】
직접 계기는 당의 실책이었다.
안서절도사 고선지가 750년 석국, 지금의 타슈켄트를 쳤다. 조공이 불성실하다는 이유였다. 항복을 받고도 약속을 어겨 왕을 장안으로 보내 처형했다.
살아남은 왕자가 아바스에 도움을 청했다. 주변 도시들도 등을 돌렸다.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668년 고구려가 무너진 뒤 당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후손이다. 그가 당의 장군이 되어 파미르를 넘고 소발률국을 정복한 것은 당대에도 놀라운 일로 기록됐다. 외국인이 최고 지휘관이 되는 것이 가능했던 시대다.
【어떻게 흘렀나】
751년 7월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탈라스강 부근에서 맞붙었다.
닷새를 버텼다. 그런데 당군에 소속돼 있던 카를루크족이 배신해 아바스 쪽으로 돌아섰다. 앞뒤로 협공당한 당군이 무너졌다.
고선지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겨우 빠져나왔다.
【그래서】
군사적 결과는 제한적이었다. 아바스는 더 동쪽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당도 곧바로 큰 손실을 입지는 않았다.
진짜 변화는 4년 뒤에 왔다.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 당이 서역에서 병력을 빼야 했다. 고선지도 이 난의 초기에 참전했다가 모함으로 처형됐다.
당이 물러난 자리에 이슬람이 들어왔다. 중앙아시아가 이슬람권이 되는 출발점이 이때다. 지금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이 이슬람 국가인 것이 이 흐름의 결과다.
【남은 것】
이 전투가 세계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붙잡힌 당군 포로 가운데 제지 기술자가 있었다는 기록이다. 두환이라는 포로가 12년 뒤 돌아와 남긴 경행기가 이 이야기의 근거다.
이후 사마르칸트에 제지소가 서고, 793년 바그다드에 제지 공장이 생겼다. 종이가 서쪽으로 퍼져 나가는 길이 열렸다.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에서 그리스어와 산스크리트어 문헌이 대량으로 번역될 수 있었던 것은 종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값싼 기록 매체 없이는 그만한 양의 번역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길로 종이가 이슬람 에스파냐를 거쳐 유럽에 닿았다. 1450년 무렵 구텐베르크가 활자를 만들었을 때 유럽에는 이미 값싼 종이가 있었다.
다만 종이가 오직 이 전투 하나로 전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그전에도 교역로를 통해 종이가 오갔다는 증거가 있다.
그래도 이 전투는 상징적이다. 두 문명이 딱 한 번 정면으로 부딪쳤고, 그 자리에서 물건이 아니라 만드는 법이 넘어갔다.
지도에서 보기: 7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안사의 난 투르-푸아티에 전투 카롤루스의 색슨 전쟁 우마이야의 이베리아 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