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루스의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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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폴리스의 성립

그리스 각지에 도시국가가 섰다. 왕정이 귀족정으로, 다시 참주정과 민주정으로 갈라졌다. 인구가 늘어 흑해와 시칠리아까지 식민시를 세웠다. 같은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로마가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운다.

한반도

고조선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전쟁 2건

춘추시대의 패권 다툼BC 770 – BC 476
제·진·초·오·월 등 제후국

주 왕실이 힘을 잃자 제후들이 「왕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서로를 쳤다. 실제로는 패자 자리를 다툰 것이다.

성복 BC 632필 BC 597취리 BC 506

결과170여 나라가 십여 개로 줄었다. 전쟁이 잦아지자 병법과 외교술이 발달했고, 그 혼란 속에서 공자와 제자백가가 나왔다.

294년 · 170국이 십여 국으로
키루스의 정복BC 547 – BC 539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vs 리디아·바빌로니아

메디아를 무너뜨린 키루스가 서쪽 리디아와 남쪽 바빌로니아로 방향을 돌렸다.

프테리아 BC 547사르디스 함락 BC 546오피스 BC 539

결과8년 만에 근동 전체를 손에 넣었다. 정복민의 종교를 인정하고 유대인을 귀환시킨 관용 정책이 통치 비용을 크게 낮췄다.

8년 · 근동 통합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4명

키루스 2세정치BC 539 · 관용으로 다스린 정복자
BC 600 – BC 530

작은 속국에서 시작해 20년 만에 근동 전체를 손에 넣었다. 정복민의 신과 관습을 인정한 것이 통치 비용을 크게 낮췄다.

  • 메디아·리디아·바빌로니아를 차례로 정복
  • 유대인의 귀환을 허락
  • 키루스 원통 — 인권 선언의 원형으로 불림
피타고라스과학BC 530 · 공동체를 이끈 수학자
BC 570 무렵 – BC 495 무렵

숫자가 만물의 근원이라 믿은 사람

  • 직각삼각형 정리를 증명
  • 수와 음악의 조화를 발견
  • 무리수의 발견으로 믿음이 흔들림
싯다르타사상BC 528 · 부처
BC 563 무렵 – BC 483 무렵

석가족 왕자로 나 스물아홉에 집을 나섰다. 극단적인 고행도 답이 아니라고 보고 가운데 길을 택했다. 그가 말한 것은 신이 아니라 원인이었다.

  • 네 가지 진리와 연기
  •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제자를 받음
  • 사르나트에서 첫 설법
마하비라사상BC 527 · 자이나교를 세운 사람
BC 599 무렵 – BC 527 무렵

부처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브라만의 권위를 부정했다. 어떤 생명도 해치지 말라는 불살생을 끝까지 밀고 갔다.

  • 아힘사 — 해치지 않음
  • 2,500년 뒤 간디가 이것을 무기로 삼는다

그 무렵의 사건

BC 528
석가의 깨달음
왕자가 고통의 원인을 묻고 답을 냈다.
생로병사를 보고 출가한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고통은 집착에서 오고 집착을 놓으면 벗어난다는 가르침이 인도를 넘어 동아시아 전체로 퍼진다.
BC 585
탈레스의 일식 예언
신화 대신 자연으로 세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밀레토스의 탈레스가 일식을 미리 맞혔다고 헤로도토스가 전한다.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 한 그의 설명이 옳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 신의 뜻이 아닌 것으로 설명하려 한 태도가 철학과 과학의 시작이었다.
BC 509
로마 공화정 수립
왕을 쫓아내고 두 명의 집정관을 뒀다.
타르퀴니우스를 추방하고 1년 임기의 집정관 둘을 뽑았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몰리지 않게 나누고 임기를 두는 발상 — 견제와 균형의 원형이 여기서 나왔다.
BC 508
아테네 민주정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시민이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추첨과 투표로 공직을 채우는 실험이 시작됐다. 2,500년 뒤 세계의 표준이 된다.
BC 594
솔론의 개혁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을 모두 풀어줬다.
아테네의 부채 노예를 해방하고 인신을 담보로 잡는 것을 금지했다. 재산 규모로 참정권을 나눠 귀족 독점을 깼다. 민주정의 첫 발판이 여기서 놓였다.
BC 500
반투의 확산
쇠와 농사를 들고 대륙 절반으로 퍼졌다.
나이지리아·카메룬 경계에서 시작한 사람들이 2,000년에 걸쳐 남쪽과 동쪽 끝까지 갔다. 얌과 바나나와 철이 함께 움직였다. 오늘 아프리카 남반부의 언어 대부분이 이 한 갈래에서 나온다.

교역로

해당 없음

키루스의 정복

전쟁 · BC 547 · 정복하고 돌려보낸 왕

메디아를 무너뜨린 키루스가 서쪽 리디아와 남쪽 바빌로니아로 방향을 돌렸다. 8년 만에 근동 전체를 손에 넣었다. 정복민의 종교를 인정하고 유대인을 귀환시킨 관용 정책이 통치 비용을 크게 낮췄다.

【그때 그 자리】 BC 6세기 중엽이다. 오리엔트가 넷으로 갈려 있었다.

메디아·리디아·신바빌로니아·이집트다.

페르시아는 그 가운데 메디아의 속국이었다. 안샨의 작은 왕국이다.

【왜 그렇게 됐나】 BC 550년 키루스 2세가 메디아를 무너뜨렸다.

외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를 친 것이라고 헤로도토스가 적었다. 손자가 자기를 몰아낼 것이라는 꿈을 꾸고 죽이라 명했는데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다.

탄생 설화의 전형이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확실한 것은 메디아군이 싸움 도중에 왕을 배신하고 키루스 쪽으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어떻게 흘렀나】 다음이 리디아다. 왕 크로이소스는 부유하기로 유명했다 — 「크로이소스만큼 부자」라는 표현이 지금도 있다.

그가 델포이 신탁에 물었다. 「페르시아를 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답이 왔다. 「큰 제국이 무너질 것이다.」

그것이 자기 제국이었다. BC 547년 사르디스가 함락됐다.

이때 낙타를 앞세워 리디아의 기병을 무력화했다고 전한다. 말이 낙타 냄새를 싫어했다는 것이다.

BC 539년 바빌론이다. 유프라테스강의 물길을 돌려 수위를 낮추고 강바닥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거의 싸우지 않고 들어갔다. 바빌론 사제들이 자기네 왕 나보니두스에게 불만이 컸기 때문이다 — 그가 마르두크 대신 달의 신을 높였다.

【그래서】 다스리는 방식이 달랐다.

「키루스 원통」이 남아 있다. 점토 원통에 아카드어로 적은 문서다.

자기가 마르두크의 뜻으로 왔다고 하고, 신상을 원래 신전으로 돌려보냈으며, 끌려온 사람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고 적었다.

그 가운데 유대인이 있었다. 바빌론 유수가 끝나고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진다.

구약이 그를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라 불렀다. 이방인 왕에게 그 말을 쓴 유일한 사례다.

【남은 것】 「키루스 원통」이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이라 불리기도 한다. 1971년 이란이 유엔에 사본을 기증했다.

학계는 그 표현을 과하다고 본다. 정복 군주가 정통성을 세우려 낸 선전 문서라는 것이다.

그래도 방식은 분명히 달랐다. 아시리아가 사람을 옮겨 섞었다면, 페르시아는 제자리에 두고 자기 신을 섬기게 했다.

그 관용이 제국을 200년 유지시켰다. 세금만 내면 언어와 종교와 관습을 그대로 두었다.

무덤이 파사르가다에에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그곳에 들렀다가 도굴된 것을 보고 복구를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도에서 보기: BC 700년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