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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서쪽에는 프랑크·서고트·동고트 왕국이 들어섰고 동쪽 로마만 제국으로 남았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옛 영토를 되찾으려 했지만 역병과 재정 파탄이 뒤따랐다.
고구려가 낙랑을 몰아내고 남하했다. 광개토대왕·장수왕 대에 최전성기를 맞았고 백제와 신라가 동맹으로 맞섰다.
왜서로마가 사라진 갈리아에서 여러 세력이 남은 조각을 다퉜다.
결과클로비스가 갈리아 대부분을 통합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 아리우스파를 택한 다른 게르만 왕들과 달리 로마계 주민과 교회를 자기 편으로 만든 결정이었다. 프랑스의 시작이다.
소수점 일곱 자리의 원주율
열다섯에 작은 부족의 왕이 되어 갈리아를 통합했다. 다른 게르만 왕들이 아리우스파를 택할 때 홀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스물셋에 쓴 책에서 지구가 자전한다고 했다. 원주율을 3.1416으로 계산했고, 일식과 월식이 그림자 때문임을 밝혔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인질로 자라 로마식 교육을 받았다. 이탈리아를 33년 다스리며 로마 제도를 그대로 유지했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전쟁 · 486 · 프랑스가 시작된 자리
서로마가 사라진 갈리아에서 여러 세력이 남은 조각을 다퉜다. 클로비스가 갈리아 대부분을 통합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 아리우스파를 택한 다른 게르만 왕들과 달리 로마계 주민과 교회를 자기 편으로 만든 결정이었다. 프랑스의 시작이다.
【그때 그 자리】 5세기 말 갈리아다. 서로마가 무너진 뒤 여러 세력이 나눠 쥐고 있었다.
북쪽에 로마 잔존 세력(시아그리우스), 남서쪽에 서고트, 남동쪽에 부르군트, 그리고 여기저기 프랑크 부족들이 있었다.
클로비스가 물려받은 것은 그 프랑크 가운데 하나, 투르네를 중심으로 한 작은 무리였다.
【왜 그렇게 됐나】 486년 수아송에서 시아그리우스를 꺾었다. 갈리아 북부가 들어왔다.
그다음이 알레만니족이다. 톨비아크에서 밀리자 아내 클로틸다가 믿는 신에게 빌었고, 이기면 세례를 받겠다 했다고 전한다.
이겼다. 랭스에서 세례를 받았다.
결정적인 것은 그가 고른 갈래다. 다른 게르만 왕국들은 아리우스파였는데 그는 가톨릭을 골랐다.
【어떻게 흘렀나】 그 선택이 곧바로 힘이 됐다.
갈리아 주민 대다수가 가톨릭이었다. 주교들이 그를 지지했고, 도시들이 저항 없이 문을 열었다.
507년 부이예에서 서고트 왕 알라리크 2세를 죽였다. 서고트가 피레네 너머 에스파냐로 밀려났다.
동고트의 테오도리쿠스가 개입해 지중해 연안 일부는 남았으나, 갈리아 대부분이 프랑크의 것이 됐다.
다른 프랑크 족장들은 하나씩 제거했다. 그레고리우스가 적기를, 친척들을 죽인 뒤 사람들 앞에서 「나는 이제 친척이 없구나. 나를 도와줄 이가 없다」고 한탄했다 한다 — 남은 친척을 끌어내려는 말이었다.
【그래서】 511년 오를레앙 공의회를 소집했다. 왕이 주교들을 모아 교회 문제를 정리한 것이다.
「살리카 법전」을 정리하게 했다. 프랑크의 관습법을 라틴어로 적은 것으로, 뒤에 프랑스 왕위 계승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근거로 인용된다.
파리를 수도로 삼았다.
【남은 것】 그해 죽으며 나라를 네 아들에게 나눠 주었다. 분할 상속이 메로베우스 왕조의 고질이 된다.
그래도 틀은 남았다. 프랑크 왕국이 카롤루스로 이어지고, 그 뒤 프랑스와 독일로 갈린다.
「프랑스(France)」라는 이름이 프랑크에서 왔다. 「클로비스」가 「루이」가 됐다.
프랑스 왕이 「가장 기독교적인 왕」이라 불리고 프랑스가 「교회의 맏딸」이라 불린 것이 이 세례에서 나왔다.
1996년 세례 150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을 때, 정교분리 원칙과 부딪힌다는 논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