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티움 해전

3000
카메라 투어 · 아무 곳이나 누르면 멈춤
◀ 왼쪽 · 오른쪽 ▶
지도에 표시
주요 국가
오른쪽 게이지를 끌거나 키보드 ↑↓로 5천 년이 흐릅니다
지도는 휠·더블클릭·드래그 · PgUp/PgDn은 스냅샷 이동
게이지를 Shift+드래그하면 10배 정밀 · 오른쪽 눈금은 인물·전쟁·사건이 있는 자리

6억 년 전
AD 2025
시대
주요 공격
주요 공격
국사

지질시대

기후

조산운동

생물과 공룡

대멸종

인류의 이동

그 해의 정치

공화정의 위기

로마가 지중해를 장악했지만 그 부가 공화정을 무너뜨렸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개혁이 유혈로 끝나고, 군벌들이 사병을 거느리며 내전이 반복됐다.

한반도

삼국의 성립

신라·고구려·백제가 차례로 서고 가야가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았다. 아직 연맹왕국 단계로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

전쟁 1건

악티움 해전BC 32 – BC 30
옥타비아누스 vs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 사후 로마를 나눠 가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충돌했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손잡자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동방에 넘어간 로마인'으로 몰았다.

악티움 BC 31알렉산드리아 BC 30

결과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패해 자결했다. 이듬해 이집트가 속주가 된다.

함선 약 400 대 500 · 하루 만에 결판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4명

아우구스투스정치BC 27 · 초대 황제
BC 63 – AD 14

공화정의 외피를 남긴 채 1인 지배를 세웠다. 200년의 로마 평화가 여기서 시작된다.

  • 악티움 승리로 내전을 끝냄
  • 공화정의 외피를 쓴 원수정 수립
  • 200년 로마 평화의 출발
클레오파트라정치BC 41 ·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은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
BC 69 – BC 30, 재위 BC 51 – BC 30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300년의 마지막 통치자. 로마의 힘을 빌려 왕국을 지키려 했으나 악티움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카이사르와 동맹, 아들 카이사리온
  • 안토니우스와 동방 재편
  • 악티움 패배 후 자결, 이집트의 로마 속주화
카이사르정치BC 44 · 종신 독재관
BC 100 – BC 44

갈리아를 정복한 군대로 로마를 차지했다. 공화정을 끝냈고 원로원에서 살해됐다.

  • 갈리아 정복
  • 루비콘을 건너 내전에서 승리
  • 율리우스력 도입
베르길리우스예술BC 19 · 로마의 건국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시인
BC 70 – BC 19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가 로마의 조상이 된다는 이야기로 아우구스투스의 새 질서에 신화를 입혔다. 단테는 그를 저승길 안내자로 삼았다.

  • 「아이네이스」 12권
  • 「농경시」「목가」
  • 중세·르네상스 라틴 문학의 표준

그 무렵의 사건

BC 27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가 첫 황제가 됐다. 200년의 로마 평화가 시작된다.
이후 200년간 지중해 전역에 큰 전쟁이 없었다. 도시와 도로와 수도교가 깔렸다.
BC 44
카이사르 암살
원로원에서 살해됐다. 공화정 회복 대신 제국이 왔다.
공화정 회복을 노린 암살이 오히려 제정을 앞당겼다.
30
예수의 처형
로마 속주 유대에서 벌어진 처형이 세계 종교의 출발점이 됐다.
속주의 처형 하나가 300년 뒤 제국의 국교가 되는 종교의 출발점이 됐다.
BC 100
옥저와 동예
고조선이 무너진 뒤 함경도·강원도 북부 동해안 지역에는 옥저와 동예라는 작은 나라들이 자리 잡았다. 둘 다 왕이 없이 각 읍락을 우두머리(읍군·삼로)가 다스렸다.
옥저는 소금과 해산물이 풍부해 고구려에 공물로 바쳤고, 신랑이 어릴 신부를 미리 데려가 키운 뒤 성인이 되면 정식 혼인하는 민며느리제라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동예는 다른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면 노비나 가축으로 배상하게 하는 책화라는 제도와, 매년 10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무천이라는 축제로 알려져 있다. 두 나라 모두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채 훗날 고구려에 흡수됐다.
BC 100
삼한(마한·진한·변한)
한반도 남부에는 마한·진한·변한이라는 작은 나라들의 연맹체가 자리했다. 이들을 통틀어 삼한이라 부르며, 훗날 각각 백제·신라·가야로 발전해 나갔다.
삼한은 각 소국마다 정치를 맡는 우두머리(신지·읍차 등)와,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이 따로 있는 제정 분리 사회였다. 천군이 다스리는 신성 구역인 소도에서는 죄인이 도망쳐 들어와도 함부로 잡아갈 수 없었다. 변한 지역은 철이 풍부해 낙랑·왜 등에 수출했으며, 이 철 생산 기반은 훗날 가야 연맹이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인도양 계절풍 항로BC 100 – 700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오간 것로마의 금화가 인도로 흘러가고 후추가 로마로 왔다. 로마 원로원이 금 유출을 걱정할 정도였다.
거점미오스호르모스 · 아덴 · 소코트라 · 무지리스

악티움 해전

전쟁 · BC 32 · 옥타비아누스 vs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 사후 로마를 나눠 가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충돌했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손잡자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동방에 넘어간 로마인'으로 몰았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패해 자결했다. 이듬해 이집트가 속주가 된다.

【그때 그 자리】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로마는 다시 내전에 들어갔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가 2차 삼두정치를 맺고 암살자들을 쫓았다. 기원전 42년 필리피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꺾었다.

그다음은 셋이 나눠 가졌다. 옥타비아누스가 서쪽, 안토니우스가 동쪽, 레피두스가 아프리카를 맡았다. 레피두스는 곧 밀려났다.

둘이 남으면 부딪친다.

【왜 그렇게 됐나】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부하 중 가장 유능한 장군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서른도 안 된 젊은이였고 몸이 약해 전장에서 자주 앓았다.

군사적으로는 안토니우스가 앞섰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아그리파라는 뛰어난 지휘관이 있었고, 무엇보다 여론을 쓰는 법을 알았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지내며 로마 영토를 그 자식들에게 나눠 줬다는 소식이 로마에 퍼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신전에서 강제로 꺼내 공개했다. 이집트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이로써 구도가 바뀌었다. 로마인끼리의 내전이 아니라 로마와 이집트 여왕의 싸움이 됐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했다. 안토니우스의 이름은 넣지 않았다.

【어떻게 흘렀나】

기원전 31년 9월 2일 그리스 서안 악티움 앞바다에서 맞붙었다.

안토니우스의 함선은 크고 무거웠다. 옥타비아누스 쪽은 작고 빨랐다.

싸움의 실상은 그전에 결정됐다. 아그리파가 해상 보급로를 끊어 안토니우스 진영은 굶주리고 말라리아가 돌았다. 탈영이 이어졌다.

전투 중에 클레오파트라의 함대 60척이 전선을 빠져나갔다. 안토니우스가 뒤따랐다. 남은 함대가 무너졌다.

이 이탈을 배신으로 볼 것인가 미리 정한 탈출 계획으로 볼 것인가는 논쟁이 있다.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함대를 보존해 이집트로 물러나려 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이듬해 옥타비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왔다. 안토니우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클레오파트라도 뒤따랐다. 독사에게 물렸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확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집트가 로마의 속주가 됐다. 3천 년 파라오의 역사가 끝났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300년도 함께 끝났다.

이집트의 곡물이 로마로 갔다. 이 곡물이 로마 시민에게 무상 배급되면서 황제의 통치 기반이 됐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됐다. 공화정이 끝나고 제정이 시작됐다. 이후 200년이 팍스 로마나다.

【남은 것】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부 로마 쪽 것이다. 승자가 만든 이미지가 2천 년을 갔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이집트어를 배운 첫 통치자였고 여러 언어를 했다. 나라를 지키려 당대 가장 강한 자와 손잡는 전략을 두 번 썼다. 두 번째가 실패했다.

미모로 나라를 팔았다는 서술과, 마지막까지 이집트의 독립을 지키려 한 정치가였다는 서술이 지금 함께 있다.

파스칼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얼굴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썼다. 이 문장이 오래 인용되는데, 정작 그가 진 이유는 코가 아니라 보급이었다.

지도에서 보기: BC 1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카이사르 내전 로마의 게르마니아 원정 갈리아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