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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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조산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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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멸종

인류의 이동

그 해의 정치

청동기의 붕괴

해양 민족의 이동과 함께 여러 왕국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한반도

고조선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전쟁 1건

목야 전투BC 1046
주 vs 상

상 주왕의 폭정에 제후들이 등을 돌렸다. 주 무왕이 「하늘의 명」을 내세워 800 제후를 모았다.

목야 BC 1046

결과상의 병력이 훨씬 많았으나 전선의 노예병이 창을 거꾸로 돌렸다. 주왕은 스스로 불에 뛰어들었고, 천명 사상이 여기서 태어났다.

하루 만에 왕조가 바뀌었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해당 없음

그 무렵의 사건

BC 1046
목야 전투
천명이 옮겨간다는 논리가 태어났다.
주 무왕이 상 주왕을 쳤다. 주는 「하늘이 덕 없는 왕에게서 명을 거둬 갔다」는 천명 사상으로 왕조 교체를 정당화했고, 이 논리가 이후 3,000년 동아시아 정치의 문법이 된다.
BC 1050
페니키아 알파벳
서기관의 독점이 22자로 깨졌다.
쐐기문자는 수백 자, 상형문자도 수백 자였다. 페니키아인은 자음 22자로 줄였고, 상인이라면 며칠이면 배웠다. 그리스인이 여기에 모음을 더해 오늘날 우리가 쓰는 알파벳이 됐다.
BC 1000
다윗의 예루살렘
작은 산성 마을이 수도가 됐다.
다윗이 여부스족의 성을 빼앗아 도읍으로 삼았다. 남북 지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지였다는 점이 선택의 이유로 꼽힌다. 3,000년 뒤에도 같은 이유로 다투는 땅이 됐다.
BC 1000
고조선이 모습을 드러내다
「삼국유사」는 단군의 건국을 BC 2333년으로 적었다. 고고학으로 실체가 잡히는 것은 비파형동검이 나오는 BC 10세기 무렵이다. 지도는 유물이 말하는 쪽을 따라 그렸다.
flag
BC 1000
노크 문화
사하라 이남에서 가장 이른 철.
나이지리아 중부에서 실물 크기에 가까운 테라코타 두상이 나온다. 눈이 삼각형이고 표정이 뚜렷하다. 같은 층에서 제철 유적이 나와, 이 지역이 청동을 건너뛰고 철로 갔음을 보여 준다.

교역로

해당 없음

목야 전투

전쟁 · BC 1046 · 주 vs 상

상 주왕의 폭정에 제후들이 등을 돌렸다. 주 무왕이 「하늘의 명」을 내세워 800 제후를 모았다. 상의 병력이 훨씬 많았으나 전선의 노예병이 창을 거꾸로 돌렸다. 주왕은 스스로 불에 뛰어들었고, 천명 사상이 여기서 태어났다.

【그때 그 자리】

기원전 11세기 상은 오래된 나라였다. 왕이 점을 쳐 조상신과 통하는 권한으로 다스렸고, 청동기와 문자를 가졌다.

주는 서쪽 위수 유역의 제후였다. 상의 신하로 서백이라 불렸다. 문화적으로는 뒤졌지만 농경 기반이 탄탄했다.

상의 마지막 왕 주왕에 대한 기록은 주 쪽에서 쓴 것이라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다만 갑골문으로 확인되는 것도 있다. 이 시기 상이 동쪽 이민족과 오랜 전쟁을 벌여 국력이 소모됐다는 점이다. 주력군이 동쪽에 나가 있었다.

【왜 그렇게 됐나】

주 문왕이 세력을 키웠다. 강태공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여기서 나온다. 위수 가에서 곧은 낚싯바늘로 낚시하던 노인을 데려왔다는 설화다.

문왕은 실행하지 않고 죽었다. 아들 무왕이 이었다.

명분이 필요했다. 신하가 임금을 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명분이 천명이다. 하늘이 덕 있는 자에게 명을 주고 덕을 잃으면 거둔다. 상이 하늘의 뜻을 저버렸으니 하늘을 대신해 벌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새로웠다. 그전까지 왕권의 근거는 조상신과의 혈연이었다. 천명은 혈통이 아니라 행실을 근거로 삼는다. 누구든 덕이 있으면 왕이 될 수 있고, 왕이라도 덕을 잃으면 쫓겨날 수 있다.

【어떻게 흘렀나】

기원전 1046년 무렵 무왕이 제후들을 모아 상의 수도 근처 목야로 진격했다.

병력은 주 쪽이 훨씬 적었다. 전차 300승과 병사 4만 5천 안팎이었다고 전한다. 상은 70만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크게 과장된 수로 본다.

싸움은 하루에 끝났다. 상의 군대 상당수가 급히 무장시킨 노예와 포로였고, 이들이 창을 거꾸로 돌려 주 쪽에 가담했다는 기록이 있다.

주왕은 궁으로 돌아가 보물을 몸에 두르고 불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주가 봉건제를 폈다. 일족과 공신을 각지에 봉해 나라를 세우게 하고 종주권을 유지했다. 혈연으로 묶는 종법 질서가 이때 자리 잡았다.

기원전 771년 견융의 침입으로 수도를 동쪽 낙읍으로 옮긴다. 이후 왕실의 권위가 약해져 춘추전국시대가 된다.

【남은 것】

이 전투가 남긴 가장 큰 것은 천명이라는 관념이다.

공자가 주의 예를 이상으로 삼았고, 맹자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인의를 해친 자는 임금이 아니라 한 사내일 뿐이니 주왕을 죽인 것은 시해가 아니라고 했다. 폭군은 바꿀 수 있다는 논리다.

이 논리가 3천 년간 동아시아에서 왕조 교체를 설명하는 언어가 됐다. 이성계가 고려를 대신할 때도, 일본에서 막부가 바뀔 때도 같은 말을 썼다.

동시에 이 논리는 이긴 쪽이 쓴다는 한계가 있다. 성공하면 천명이고 실패하면 반역이다.

주지육림과 포락지형 같은 주왕의 폭정 이야기는 후대로 갈수록 자세해진다. 사기보다 그 뒤 기록에 더 잔혹하게 나온다. 이야기가 자라난 것이다.

지도에서 보기: BC 15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서주의 정벌과 견융의 침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