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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라틴 유럽·비잔틴·이슬람이 지중해를 나눠 가졌다. 카롤루스의 제국은 곧 쪼개졌고 바이킹과 마자르가 유럽을 휘저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당이 무너지고 송이 섰다.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왜인구 압력과 흘수 얕은 롱십이 결합했다. 강을 거슬러 내륙까지 들이닥칠 수 있는 배가 결정적이었다.
결과약탈로 시작해 정착과 건국으로 끝났다. 노르망디·러시아·아이슬란드가 이들의 손에서 생겼고, 북아메리카에도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닿았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잇는다는 뜻으로 국호를 정했다. 호족을 혼인으로 묶었다.
애꾸눈의 승려 출신으로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며 일어섰다. 스스로 미륵불이라 하며 관심법으로 사람을 죽이다 쫓겨났다.
농민의 아들로 신라 군인이 되었다가 완산주에서 나라를 세웠다. 240년 전에 망한 백제의 이름을 다시 꺼냈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인물 · 918 · 고려 태조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잇는다는 뜻으로 국호를 정했다. 호족을 혼인으로 묶었다.
【그때 그 자리】
9세기 말 신라는 안에서 풀렸다. 진성여왕 때 조세가 걷히지 않고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지방에서는 호족이 성을 쌓고 스스로 장군을 칭했다.
왕건의 집안은 송악의 해상 세력이었다. 예성강 하구에서 중국과 교역하며 부를 쌓았다. 이 배경이 중요하다. 그는 땅에 매인 지주가 아니라 배로 사람과 물건을 다루던 집안 출신이었다.
【왜 그렇게 됐나】
896년 스무 살에 궁예 밑으로 들어갔다. 수군을 이끌고 나주를 점령해 후백제의 배후를 눌렀다. 이 공으로 시중까지 올랐다.
궁예는 갈수록 흔들렸다. 스스로 미륵불이라 하고 관심법으로 사람 속을 읽는다며 신하와 아내와 자식을 죽였다. 918년 신숭겸과 배현경과 홍유와 복지겸이 왕건을 세웠다.
【어떻게 흘렀나】
그는 힘으로 밀지 않았다.
호족을 혼인으로 엮었다. 부인이 29명이고 그만큼의 가문이 처가가 됐다. 자기 성을 내려주는 사성 정책도 폈다.
신라에 대해서는 특히 조심했다. 927년 견훤이 경주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였을 때, 왕건은 5천을 이끌고 구원하러 갔다가 공산에서 크게 졌다. 신숭겸이 왕건의 갑옷을 바꿔 입고 대신 죽었다.
그런데 이 패배가 여론을 바꿨다. 신라 사람들에게 견훤은 왕을 죽인 자였고 왕건은 구하러 온 자였다. 935년 경순왕이 싸움 없이 나라를 넘긴 배경에 이것이 있다.
후백제는 안에서 갈라졌다. 935년 견훤이 넷째 아들에게 왕위를 주려 하자 맏아들 신검이 아버지를 금산사에 가뒀다. 견훤이 탈출해 왕건에게 왔다. 936년 일리천에서 왕건은 항복한 견훤을 앞세우고 신검을 깼다.
【그래서】
통일 뒤 그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였다. 926년 거란에 망한 발해의 세자 대광현이 수만 명을 이끌고 오자 왕씨 성을 주고 자리를 마련했다. 고구려를 잇는다는 국호에 걸맞은 행동이었다.
거란에는 강경했다. 942년 거란이 낙타 50마리를 보내오자,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며 사신을 유배 보내고 낙타를 만부교 아래 매어 굶겨 죽였다.
【남은 것】
943년 죽으며 훈요십조를 남겼다. 불교를 존중하되 사찰을 함부로 늘리지 말 것, 서경을 중시할 것, 거란을 경계할 것 등이 들어 있다.
그중 차령 이남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조항은 후백제 지역을 겨냥한 것으로 읽혀 지역 차별의 오랜 뿌리로 인용된다. 다만 이 조항이 후대에 끼어들었다는 견해도 있다.
29명의 부인은 통합의 방법이었지만 동시에 화근이 됐다. 왕자가 스물다섯이라 그가 죽은 뒤 왕위 다툼이 이어졌다. 2대 혜종과 3대 정종이 짧게 죽고, 4대 광종이 숙청으로 정리하기까지 30년이 걸렸다.
통합을 위해 쓴 방법이 다음 세대의 분열을 낳았다는 점에서, 이 인물은 늘 함께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