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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바닷길을 열어 아메리카를 유럽 경제에 편입시켰다. 인쇄술이 종교개혁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새 왕조. 훈민정음과 측우기의 시대이자 사림과 훈구가 다투던 때다.
왜부유하고 분열된 이탈리아를 두고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 65년을 다퉜다.
결과화약·상비군·용병이 결합한 근대 전쟁의 실험장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이 혼란 속에서 쓰였고,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이 전쟁으로 끝났다.
왜금을 찾던 코르테스가 아즈텍에 눌려 있던 부족들을 규합했다. 천연두가 먼저 도시를 무너뜨렸다.
결과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되고 에스파냐가 아메리카 본토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왜코르테스가 데려온 것은 500여 명이었다. 실제 병력은 아즈텍에 원한을 품은 원주민 수만 명이었다.
결과싸움보다 병이 먼저였다. 천연두가 도시 안에 퍼져 인구가 급감했다. 코르테스는 호수에서 쓸 배 13척을 만들어 둑길을 무력화했다. 인구 20만의 도시가 80일 만에 무너졌다.
인구 20만의 도시를 다스렸다. 당시 유럽 어느 도시보다 컸다. 에스파냐인을 궁에 들였다가 볼모가 됐고 성난 자기 백성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한다.
남아메리카 끝의 해협을 찾아 태평양에 이름을 붙였다. 필리핀에서 전사했으나 남은 배 한 척이 세비야로 돌아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다.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인쇄술을 타고 2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다.
스물다섯에 아즈텍의 마지막 지도자가 되어 80일 포위를 버텼다. 금을 어디 숨겼느냐며 발을 불에 지지는 고문을 받았다. 지금 멕시코에서 저항의 상징이다.
수백 명의 병사와 원주민 동맹, 천연두로 테노치티틀란을 함락했다. 아즈텍은 무너지고 그 자리에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이 세워졌다.
교회의 부패를 풍자하고 그리스어 신약을 펴냈다. 루터에게 길을 열었지만 분열은 거부했다.
덴마크가 주도하던 칼마르 동맹에 맞서 반란을 이끌었다. 1523년 스웨덴 왕으로 추대되며 근대 스웨덴 왕국의 시조가 됐다.
군주는 사랑받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낫다 — 피렌체 외교관이 실직 후 쓴 얇은 책이 근대 정치학의 출발이 됐다.
티무르와 칭기즈 칸의 피를 함께 받았다. 사마르칸트를 되찾으려다 실패하고 카불로 밀려났다가 인도로 내려갔다. 회고록을 직접 썼다.
조각가를 자처했으나 교황의 명으로 4년간 천장에 매달려 「천지창조」를 그렸고, 여든 넘어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설계했다.
베오그라드와 로도스를 취하고 빈을 포위했다. 법전을 정비하고 이스탄불을 건축으로 채워 튀르크인은 그를 카누니(입법자)라 부른다.
에스파냐·네덜란드·오스트리아·나폴리·신대륙을 한 손에 쥐었다. 루터를 심문했고 프랑스와 오스만과 싸우다 지쳐 수도원으로 물러났다.
형과 5년을 싸워 이긴 직후 168명의 에스파냐인에게 사로잡혔다. 몸값으로 방 하나를 금으로, 두 개를 은으로 채웠는데도 죽임을 당했다.
168명으로 카하마르카에서 황제 아타우알파를 사로잡고 방 하나 가득한 금을 받은 뒤 죽였다. 쿠스코가 무너지고 리마가 세워졌다.
여섯 번 결혼하고 두 왕비를 처형했다. 교황이 이혼을 거부하자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됐다.
14세에 타브리즈를 점령하고 샤가 됐다. 12이맘 시아파를 강제해 수니파 이웃들과 갈라선 페르시아의 정체성이 여기서 나왔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에서 신 앞의 평등과 카스트 부정을 설파하며 시크교를 열었다. 그의 가르침은 이후 아홉 명의 구루를 거쳐 경전 「구루 그란트 사히브」로 집대성됐다.
풀과 벌레를 그렸다. 당시 여성의 그림이 남은 것 자체가 드물다. 아들 이이를 길렀다는 것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오래된 문제다.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캘리컷에 도착했다. 향료 무역의 길이 바뀌었고 포르투갈이 인도양의 주인이 됐다.
예정설과 엄격한 교회 규율. 그의 가르침은 네덜란드·스코틀랜드·뉴잉글랜드로 퍼져 근대 서구의 정신을 만들었다.
폴란드의 성직자이자 천문학자였다. 죽는 해에야 책을 냈다. 지구가 도는 편이 계산이 훨씬 단순하다는 것이 그의 근거였다.
시신을 직접 해부해 갈레노스 이래 1,300년 된 오류를 바로잡았다.
장군으로 손니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올랐다. 메카 순례 뒤 팀북투를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 키웠다.
바스쿠 다 가마 이후 400년.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 닿는 길이 열리며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밀려났다.
인물 · 1519 · 손님인지 적인지 판단하지 못한 사이
인구 20만의 도시를 다스렸다. 당시 유럽 어느 도시보다 컸다. 에스파냐인을 궁에 들였다가 볼모가 됐고 성난 자기 백성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한다.
【그때 그 자리】 1502년 아스테카(멕시카)의 지도자가 됐다. 수도 테노치티틀란은 호수 위의 도시로, 인구가 20만이었다 — 당시 유럽 어느 도시보다 컸다.
제방과 다리와 수도교가 있었고, 시장에 하루 6만 명이 드나든다고 에스파냐인들이 적었다.
제국은 정복한 도시들에게 공물을 받는 구조였다. 그래서 미움을 산 곳이 많았다.
【왜 그렇게 됐나】 1519년 코르테스가 600명으로 상륙했다.
목테수마가 사절을 보내 금을 주었다. 물러가라는 뜻이었는데, 반대 효과가 났다.
케찰코아틀 신의 귀환으로 여겨 맞아들였다는 설명이 오래 통용됐다. 지금은 의심받는다 — 그 이야기가 정복 이후 에스파냐 쪽 기록에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은 정보 부족이다. 저들이 무엇인지, 몇 명이 더 오는지, 무기가 무엇인지 몰랐다. 관찰하기로 한 것이다.
그 사이 코르테스는 틀락스칼라를 비롯한 반(反)아스테카 세력을 모았다. 최종적으로 수만 명의 원주민 동맹군이 붙었다. 정복은 에스파냐인 600명이 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흘렀나】 코르테스가 도시에 들어왔다. 목테수마가 궁으로 맞았다.
며칠 뒤 코르테스가 그를 사실상 인질로 삼았다. 그런데도 목테수마는 형식상 계속 다스렸다.
1520년 코르테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부관 알바라도가 축제 중인 귀족들을 학살했다. 도시가 봉기했다.
코르테스가 목테수마를 옥상에 세워 사람들을 진정시키게 했다. 돌이 날아왔다.
사흘 뒤 죽었다. 돌에 맞아 죽었다는 에스파냐 기록과, 쓸모없어지자 에스파냐인이 죽였다는 원주민 기록이 갈린다.
【그래서】 그해 「슬픈 밤」에 에스파냐군이 쫓겨났다. 절반 넘게 죽었다.
그러나 곧 천연두가 왔다. 도시 인구의 상당수가 죽었다. 다음 지도자 쿠이틀라우악도 80일 만에 병사했다.
1521년 도시가 함락된다.
【남은 것】 멕시코에서 그는 오래 겁쟁이로 그려졌다. 저항하지 않고 나라를 넘긴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서사가 만들어진 것이라는 연구가 늘고 있다. 에스파냐도 뒤의 멕시코 민족주의도 각자의 이유로 그를 약한 왕으로 그릴 필요가 있었다.
제국이 무너진 원인은 그의 성격보다 다른 데 있었다 — 공물에 시달린 속국들의 이반, 그리고 면역이 없던 전염병이다.
테노치티틀란은 메워졌고 그 위에 멕시코시티가 섰다. 대성당이 대신전 자리 옆에 있다.
1978년 전기 공사를 하다 대신전의 유적이 나왔다. 도시 한복판 땅 밑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