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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그리스 각지에 도시국가가 섰다. 왕정이 귀족정으로, 다시 참주정과 민주정으로 갈라졌다. 인구가 늘어 흑해와 시칠리아까지 식민시를 세웠다. 같은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로마가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운다.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왜주 왕실이 힘을 잃자 제후들이 「왕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서로를 쳤다. 실제로는 패자 자리를 다툰 것이다.
결과170여 나라가 십여 개로 줄었다. 전쟁이 잦아지자 병법과 외교술이 발달했고, 그 혼란 속에서 공자와 제자백가가 나왔다.
왜철제 무기와 상비군, 공성탑을 갖춘 최초의 군사국가가 근동을 통째로 삼키려 했다.
결과이집트에서 페르시아만까지 하나로 묶었지만, 정복지 주민을 통째로 옮겨 심는 공포 통치가 사방에 적을 만들었다. 결국 바빌로니아·메디아 연합에 지워졌다.
남쪽 쿠시의 왕이 북쪽으로 올라가 이집트 전체를 다스렸다. 25왕조를 검은 파라오들이라 부른다. 그들은 이집트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옛 전통을 되살렸다.
정복지를 속주로 바꾸고 주민을 강제 이주시켜 반란의 뿌리를 뽑았다. 잔혹했지만 효율적이었고, 이후 모든 제국이 이 방식을 참고했다.
실존 여부조차 확실치 않다. 눈이 멀었다는 전승만 있고, 여러 음유시인의 노래가 한 이름으로 묶였을 수 있다.
해당 없음
인물 · BC 744 · 이집트를 다스린 누비아 왕
남쪽 쿠시의 왕이 북쪽으로 올라가 이집트 전체를 다스렸다. 25왕조를 검은 파라오들이라 부른다. 그들은 이집트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옛 전통을 되살렸다.
【그때 그 자리】 BC 8세기 이집트는 갈라져 있었다. 여러 세력이 삼각주와 중부를 나눠 쥐고 있었다.
남쪽 누비아에 쿠시 왕국이 있었다. 수도는 나파타다.
이집트가 오래 지배했던 땅인데, 이집트가 약해지자 거꾸로 올라왔다.
【왜 그렇게 됐나】 쿠시는 이집트 문화를 자기 것으로 삼고 있었다. 아문 신을 섬기고 피라미드를 세우고 상형문자를 썼다.
피예는 자기가 이집트를 정복하러 간 것이 아니라, 무너진 옛 질서를 바로잡으러 간다고 내세웠다.
BC 727년 무렵 북진했다.
【어떻게 흘렀나】 「승전비」가 남아 있다. 게벨 바르칼에서 나온 큰 화강암 석비로, 이집트어로 길게 적혀 있다.
군사 기록인데 내용이 특이하다.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 테베에 들어가면 먼저 몸을 씻고 아문 신에게 예를 갖추라고 했다.
항복한 왕들을 죽이지 않았다. 그대로 자리에 두고 신하로 삼았다.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은 말 이야기다. 헤르모폴리스를 함락한 뒤 마구간에 들어가 말들이 굶은 것을 보고 화를 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 내 말들이 굶은 것이 네가 저지른 어떤 죄보다 나쁘다.」
이집트 왕 이름 표기 방식(다섯 이름)을 그대로 갖춰 썼다. 정복자가 아니라 정통 파라오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25왕조가 열렸다. 「쿠시 왕조」 또는 「검은 파라오」라 부른다.
약 100년을 갔다. 이 시기에 옛 왕국 시대의 미술과 건축을 의식적으로 되살렸다 — 이집트인보다 더 이집트적이려 했다는 평이 있다.
BC 671년 아시리아가 쳐들어와 밀려났다. 다시 남쪽으로 물러나 메로에로 수도를 옮긴다.
【남은 것】 수단에 피라미드가 200기 넘게 남아 있다. 이집트에 있는 것보다 많다.
작고 가파르다. 지금 관광객이 거의 가지 않는다.
「이집트를 지배한 아프리카 왕조」라는 사실이 오래 교과서에서 빠져 있었다. 19세기 유럽 학자들이 그럴 리 없다고 여겨 다른 설명을 붙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발굴로 정리됐다. 다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지도에서 보기: BC 10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호메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