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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유럽 대부분이 절대군주의 궁정 정치로 움직였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전쟁이 반복됐고, 그 아래 살롱과 백과전서에서 왕권을 의심하는 사상이 자랐다.
세도정치와 삼정 문란이 겹쳤다. 서양 선박이 연안에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문을 닫아걸었다.
왜하이데르 알리와 아들 티푸 술탄의 마이소르가 프랑스와 손잡고 남인도에서 영국에 맞섰다.
결과네 차례 전쟁 끝에 티푸 술탄이 성벽에서 죽었다. 로켓 부대로 영국군을 놀라게 한 마이소르는 영국의 위성국이 됐다.
세 차례 항해로 태평양의 해안선을 그렸다. 감귤로 괴혈병을 막아 긴 항해를 가능하게 했다. 그가 그린 지도가 곧 식민의 지도가 됐다.
독립을 이끌고 왕이 되기를 거절했다. 두 번의 임기 뒤 스스로 물러났다.
규장각을 세우고 수원 화성을 쌓았다. 탕평으로 붕당을 눌렀다.
「보이지 않는 손」— 각자가 자기 이익을 좇을 때 사회 전체가 부유해진다. 분업과 자유무역을 설명한 이 책이 자본주의의 경전이 됐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썼으면서 노예 600명을 소유했다. 루이지애나를 사들여 나라를 두 배로 넓혔다.
인쇄공에서 시작해 피뢰침을 발명하고 프랑스를 독립전쟁의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독립선언과 헌법에 모두 서명한 유일한 인물 중 하나다.
분리 응축기로 증기기관의 효율을 세 배 올렸고 회전 운동으로 바꿔 공장과 기차를 움직였다. 힘의 단위 「와트」가 그의 이름이다.
독일 출신 공주로 시집와 쿠데타로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34년 재위 동안 영토를 크게 넓히고 계몽사상을 받아들였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는 그의 말이 프랑스 혁명의 구호가 됐다.
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화원이면서 씨름하고 서당에서 우는 아이를 그렸다. 그림의 주인공이 왕에서 사람으로 내려온 순간이다.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썼다. 오랑캐라 부르던 나라가 실제로는 더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적었다.
준가르를 멸하고 신장을 얻어 청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 「사고전서」를 편찬했으나 만년의 부패와 매카트니 사절 거절이 몰락을 예고했다.
「당신의 말에 반대하지만 말할 권리는 목숨 걸고 지키겠다」— 그의 이름과 함께 전해지는 이 정신이 표현의 자유의 표어가 됐다.
평생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의 틀로 본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었다.
생물 분류 체계를 세우다
슐레지엔을 빼앗고 7년전쟁에서 유럽 전체를 상대로 버텼다. 플루트를 불고 볼테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국가의 제1 종복」을 자처했다.
다섯 살에 작곡하고 여덟 살에 교향곡을 썼다. 「피가로의 결혼」「돈 조반니」「마술피리」와 미완의 「레퀴엠」을 남기고 빈에서 빈곤 속에 죽었다.
정밀한 저울로 연소와 질량 보존을 증명했다. 프랑스 혁명 중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덕 없는 공포는 해롭고 공포 없는 덕은 무력하다. 혁명을 지키려 단두대를 돌리다 자신도 거기서 죽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시집온 14세 소녀가 사치의 상징이 됐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은 하지 않은 말이지만 민중의 분노는 진짜였다.
여자라는 이유로 유럽이 상속을 부정하자 헝가리 귀족 앞에 아기를 안고 나서 군대를 얻었다. 40년 동안 제국을 개혁했다.
우두 고름을 접종해 천연두를 막는 첫 백신을 만들었다.
바스쿠 다 가마 이후 400년.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 닿는 길이 열리며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밀려났다.
유럽의 공산품 → 아프리카의 노예 → 아메리카의 설탕·면화 → 유럽. 세 대륙이 하나의 경제로 묶였다.
인물 · 1770 · 지도의 빈칸을 메운 항해
세 차례 항해로 태평양의 해안선을 그렸다. 감귤로 괴혈병을 막아 긴 항해를 가능하게 했다. 그가 그린 지도가 곧 식민의 지도가 됐다.
【그때 그 자리】 18세기 유럽 지도에서 태평양은 거의 비어 있었다. 남쪽 어딘가에 거대한 대륙(테라 아우스트랄리스)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농장 일꾼의 아들로 태어나 석탄 운반선에서 항해를 배웠다. 해군에 평선원으로 들어가 장교까지 올라갔다 —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다.
【왜 그렇게 됐나】 1768년 첫 항해의 명목은 과학이었다. 타히티에서 금성이 태양 앞을 지나는 것을 관측하는 일이다.
여러 곳에서 동시에 관측하면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계산할 수 있었다. 국제 공동 관측이었다.
봉인된 두 번째 명령이 따로 있었다. 남쪽 대륙을 찾으라는 것이다.
【어떻게 흘렀나】 뉴질랜드를 일주해 섬임을 확인하고,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며 지도를 그렸다.
두 번째 항해(1772~75)에서 남극권을 세 번 넘었다. 거대한 남쪽 대륙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 있다면 얼음 아래라고 적었다.
세 번째 항해(1776~79)에서 북서항로를 찾다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에서 죽었다. 원주민과 다툼 끝에 살해됐다.
【그래서】 항해술에서 남긴 것이 크다. 괴혈병으로 죽은 선원이 거의 없었다 — 자우어크라우트와 신선한 채소를 강제로 먹였다. 처음에는 선원들이 거부하자 장교 식탁에만 올려 「높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 만들었다.
해리슨의 크로노미터를 실전에서 검증해 경도 측정을 정확하게 했다.
그가 그린 해도는 100년 넘게 쓰였다.
【남은 것】 평가가 갈린다. 그는 대체로 원주민에게 폭력을 자제하려 했고, 관찰 기록도 편견이 적은 편이다.
그러나 그의 지도가 식민화의 길을 열었다. 그가 「무주지(terra nullius)」라 적은 오스트레일리아에는 6만 년 동안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와이에서는 오랫동안 그의 죽음을 신화로 설명해 왔다. 지금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 그의 동상이 훼손되는 일이 반복된다 — 같은 사람을 두고 발견자와 침입자라는 두 기억이 부딪힌다.
지도에서 보기: 1715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워싱턴 정조 애덤 스미스 제퍼슨 벤저민 프랭클린 제임스 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