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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유럽 대부분이 절대군주의 궁정 정치로 움직였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전쟁이 반복됐고, 그 아래 살롱과 백과전서에서 왕권을 의심하는 사상이 자랐다.
세도정치와 삼정 문란이 겹쳤다. 서양 선박이 연안에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문을 닫아걸었다.
왜하이데르 알리와 아들 티푸 술탄의 마이소르가 프랑스와 손잡고 남인도에서 영국에 맞섰다.
결과네 차례 전쟁 끝에 티푸 술탄이 성벽에서 죽었다. 로켓 부대로 영국군을 놀라게 한 마이소르는 영국의 위성국이 됐다.
왜7년전쟁으로 진 빚을 식민지 세금으로 메우려 하자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반발이 터졌다.
결과13개 식민지가 영국을 몰아냈다.
왜무굴이 무너진 뒤 인도 중부를 지배하던 마라타 동맹의 내분에 회사가 개입했다.
결과웰즐리(뒷날 웰링턴)가 아사예에서 이기고 세 번째 전쟁으로 동맹이 해체됐다. 이로써 영국은 인도 아대륙의 실질적 지배자가 됐다.
독립을 이끌고 왕이 되기를 거절했다. 두 번의 임기 뒤 스스로 물러났다.
규장각을 세우고 수원 화성을 쌓았다. 탕평으로 붕당을 눌렀다.
「보이지 않는 손」— 각자가 자기 이익을 좇을 때 사회 전체가 부유해진다. 분업과 자유무역을 설명한 이 책이 자본주의의 경전이 됐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썼으면서 노예 600명을 소유했다. 루이지애나를 사들여 나라를 두 배로 넓혔다.
인쇄공에서 시작해 피뢰침을 발명하고 프랑스를 독립전쟁의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독립선언과 헌법에 모두 서명한 유일한 인물 중 하나다.
분리 응축기로 증기기관의 효율을 세 배 올렸고 회전 운동으로 바꿔 공장과 기차를 움직였다. 힘의 단위 「와트」가 그의 이름이다.
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화원이면서 씨름하고 서당에서 우는 아이를 그렸다. 그림의 주인공이 왕에서 사람으로 내려온 순간이다.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썼다. 오랑캐라 부르던 나라가 실제로는 더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적었다.
평생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의 틀로 본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었다.
세 차례 항해로 태평양의 해안선을 그렸다. 감귤로 괴혈병을 막아 긴 항해를 가능하게 했다. 그가 그린 지도가 곧 식민의 지도가 됐다.
다섯 살에 작곡하고 여덟 살에 교향곡을 썼다. 「피가로의 결혼」「돈 조반니」「마술피리」와 미완의 「레퀴엠」을 남기고 빈에서 빈곤 속에 죽었다.
정밀한 저울로 연소와 질량 보존을 증명했다. 프랑스 혁명 중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독일 출신 공주로 시집와 쿠데타로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34년 재위 동안 영토를 크게 넓히고 계몽사상을 받아들였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는 그의 말이 프랑스 혁명의 구호가 됐다.
준가르를 멸하고 신장을 얻어 청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 「사고전서」를 편찬했으나 만년의 부패와 매카트니 사절 거절이 몰락을 예고했다.
「당신의 말에 반대하지만 말할 권리는 목숨 걸고 지키겠다」— 그의 이름과 함께 전해지는 이 정신이 표현의 자유의 표어가 됐다.
덕 없는 공포는 해롭고 공포 없는 덕은 무력하다. 혁명을 지키려 단두대를 돌리다 자신도 거기서 죽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시집온 14세 소녀가 사치의 상징이 됐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은 하지 않은 말이지만 민중의 분노는 진짜였다.
생물 분류 체계를 세우다
슐레지엔을 빼앗고 7년전쟁에서 유럽 전체를 상대로 버텼다. 플루트를 불고 볼테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국가의 제1 종복」을 자처했다.
우두 고름을 접종해 천연두를 막는 첫 백신을 만들었다.
마이소르의 왕으로 네 차례 영국과 싸웠다. 로켓 무기를 실전에 썼고, 그 기술이 영국으로 건너가 콩그리브 로켓이 됐다.
최초의 전지를 만들다
수원 화성에 거중기를 만들어 썼다. 천주교 문제로 18년간 강진에 유배됐고, 그 유배지에서 500권을 썼다.
정수론·통계학·측지학까지 남긴 업적이 방대해 수학자들의 왕이라 불린다.
노예로 태어나 프랑스·에스파냐·영국군을 차례로 물리쳤다. 나폴레옹에게 붙잡혀 알프스 감옥에서 죽었으나 이듬해 아이티가 독립했다.
바스쿠 다 가마 이후 400년.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 닿는 길이 열리며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밀려났다.
유럽의 공산품 → 아프리카의 노예 → 아메리카의 설탕·면화 → 유럽. 세 대륙이 하나의 경제로 묶였다.
인물 · 1776 · 조선 22대 왕
규장각을 세우고 수원 화성을 쌓았다. 탕평으로 붕당을 눌렀다.
【그때 그 자리】
1762년 열한 살의 이산은 할아버지 영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것을 봤다. 여드레 만에 죽었다.
이 사건이 그의 처지를 정했다.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논리가 있었다. 영조는 그를 죽은 큰아들의 양자로 입적시켜 법적으로 사도세자와 끊었다. 즉위하던 날 정조는 첫마디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자기 정통성을 자기 입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조정은 붕당으로 갈려 있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본 노론 벽파가 다수였다. 즉위 초 자객이 침전 지붕까지 들어온 일이 있었다.
【왜 그렇게 됐나】
정조는 힘을 밖에서 만들었다. 1776년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세웠다. 왕실 도서관이라는 이름이었지만 실제로는 자기 사람을 기르는 곳이었다.
핵심은 서얼 등용이다. 1779년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뽑았다. 넷 다 서자였다. 능력이 있어도 제도가 막아 두었던 사람들이니, 이들의 충성은 붕당이 아니라 왕에게 갔다.
1785년 장용영을 만들어 왕 직속 군대를 두었다. 붓과 칼을 함께 자기 손에 두려 한 것이다.
【어떻게 흘렀나】
실무 개혁도 이어졌다. 1791년 신해통공으로 시전 상인의 독점권을 없앴다. 난전이라며 단속하던 것을 풀어 누구나 장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노비 추쇄를 금하고, 형벌에 쓰는 도구의 규격을 정해 고문을 줄였다.
1789년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 화성으로 옮기고, 1794년부터 2년 8개월 만에 성을 쌓았다. 정약용이 거중기를 만들어 썼다. 이 공사에 동원된 인부에게 임금을 지급한 기록이 남아 있다. 부역이 아니라 품삯이었다.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에 맞춰 8일간 화성으로 행차했다. 6천 명이 움직인 이 행렬을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그림과 함께 남겼다. 이 행차는 효도이자 시위였다.
【그래서】
1800년 마흔여덟에 갑자기 죽었다. 종기가 원인이라고 기록됐다. 독살설이 오래 돌았지만 승정원일기의 치료 기록으로 보아 병사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가 죽자 열한 살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했다. 장용영이 해체되고 규장각이 축소됐으며 천주교 박해가 시작됐다. 이후 60년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이어진다.
【남은 것】
한 사람에게 걸린 개혁은 그 사람이 죽으면 끝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자주 인용된다. 정조는 제도를 만들었지만 그 제도를 지탱할 세력을 자기 밖에 만들지 못했다.
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한국전쟁으로 크게 부서졌는데, 공사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 기록이 건물을 살린 것이다.
지도에서 보기: 1715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워싱턴 애덤 스미스 제퍼슨 벤저민 프랭클린 제임스 와트 김홍도